프롤로그 | 언어의 붕괴.
“어떤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사용한 언어를 재구성해 그들의 풍습, 제도, 계통, 인종 등을 밝힐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의 공통성으로부터 혈족 관계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어족이 인류학적 종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게르만 민족을 가정해보자. 그들 특색은 뚜렷하다. 금발, 긴 두골, 큰 키… 스칸디나비아형이 가장 완벽한 그들 형태다. 그러나 게르만어를 말하는 모든 주민들이 이 특징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알프스 산맥 아래 알레마니아인은 스칸디나비아인과는 아주 다른 형태다. 그렇다면 한 고유언어는 본래 한 인종에게만 속하고 그 언어가 타 민족에 의해 쓰여진다면 정복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일까? 물론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고올인처럼 정복자 언어를 채용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종족들이 있음을 종종본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게르만어의 경우, 수많은 이민족을 굴복시켰다 할지라도 이들을 모두 병합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족 관계와 언어 공통성과는 그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인종의 단일성이란 언어 공통성의 이차적 요인이지 필수적 요인은 전혀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단일성이 있는데 그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서 유일하게 본질적인 것인 바, 사회적 유대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민족성이라 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최고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와 혈족 또는 민족성에 관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창세기 바벨탑 사건은 철저한 시스템의 붕괴로 이해될 수 있다.
프린서플 | 방언은 왜 이상한 말(glossolalia)인가?
“아주사Asusa) 거리에 있는 한 초라한 오두막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상한 교리를 믿는 신자들이 극도로 광적인 예배를 드리며, 대단히 급진적인 교리를 설교하고,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흥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회중들은 흑인과 약간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시간 동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울부짖으면서 그 신자들이 신경을 자극하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기 때문에 밤만 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더욱이 그 신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 이상한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Los Angeles Times Apr. 18, 1906, p. 1)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만나는 은사주의 형식의 원형으로 꼽히는 한 집회의 현장 스케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는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만나듯이, 우리가 바울의 로마서를 만날 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만나듯이, 본문에(행 2:1-21) 나오는 오순절 장면을 오늘날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보편적 교회사 시각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직전 중세교회 시스템 붕과가 있었듯이, 위의 아주사 사건 직전에는 경건주의 시스템 붕괴조짐이 보였듯이,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은사주의를 포함한 총체적 시스템 붕괴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붕괴된 시스템의 복원이 오로지 “듣기” 기능과 맞물려 있다고 전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듣는다.
우선 ‘눈치’라는 말로 이해하면 쉽겠습니다. 두려워 눈치를 보거나 약삭빠르게 눈치를 본다는 부정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부지런하게 듣는 사람은 보다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계 형성의 큰 밑거름이 됩니다.
신뢰로 듣는다.
신뢰가 상실되면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듣기의 구조는 신뢰 입니다.
영으로 듣는다.
이것은 가장 우월한 듣기의 형식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 혼자서만 들을 수 있는 듣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혼자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그랬으며 바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에필로그 | 언어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
그러므로 방언의 본질은 그 말의 어떤 신비로운 해석에 있는 것같지만 실상은 이상한 말(glossolalia) 그 자체에 더 의도된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궁극적 복원은 듣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부모 자식, 부부, 가정, 교회, 사회, 국가, 그 모든 듣기의 관계 복원에 기여해야 사도행전 2:1-21 사건의 본령에 응한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누가(Luke)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 지점을 창세기 바벨탑에서 발생한 문제의 복원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참조:
thetowerofbabel.net
S-a-q-u-a-r-i-u-s.deviantart.com
wikipedia.orgwww.answersingenesis.orgimages.yourdictiona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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