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이 글은 죽음과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미로와 같은 세상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 지에 관한 설교를 성서일과에 맞추어 소고 형식으로 요약한 글입니다.
프롤로그: 미로와 사이렌
미로(迷路)란 출발 지점에서 도착 지점까지 아주 복잡하게 이루어진 길을 말합니다. 방향(성)을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혀 출구로 향하는 (갈림)길 없이 닫힌 길들의 연결을 일컫는 말로 미궁(迷宮)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길을 찾지 못할 때는 그 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유사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그 길의 노정에서 불안과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는 이유도 그 유사한 공간의 형식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 심화됩니다. 그런 점에서 미로/미궁은 신화적입니다.
인간 삶의 여정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테세우스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 아들을 얻은 크레타 크노소스의 미노스 왕이 그 아들을 가둬 놓기 위해 만든 공간이 미로입니다. 그 길은 영원히 찾을 수 없도록 설계 도면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호머에 의해 그려진 오디세우스의 삶과 모험 자체가 또한 미로입니다. 출구 곧 종착지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쉽사리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미로/미궁입니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에 잡입했던 테세우스는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뭉치를 풀며 들어갔다 그 실을 따라 다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경우는 수많은 미궁 중 사이렌이라는 해상의 미궁에 직면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부하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고 자신의 몸은 돛에 묶음으로써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실타래를 풀었다 다시 따라나가는 방식에서는 자기가 왔던 길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유사한 길을 구별해낸 일관성이 엿보입니다. ‘일관성’이 곧 방도입니다. 오디세우스의 경우도 부하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게 함으로써 자기네 마음과 유사한 노래 곧, “내 노래를 들으면 너희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사이렌 소리를 듣지 않음으로써 역시 그 일관성을 보존했습니다. 유혹이란 그런 것이죠. 유사함으로 꼬시는.
그런데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정작 오디세우스는 귀를 막지 않아요. 왜 자기 귀는 틀어 막지 않은 것일까요? 부하들은 귀를 막게 하고 자기 자신은 왜 귀는 열어둔 채 몸만 묶은 것일까요?
미로를 빠져나오는 법
일찍이 플라톤은 사람처럼 이성을 가진 동물은 밖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이 있고 그보다 열등한 동물은 안으로 향하는 성질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근·현대에 활동하던 종교학자 엘리아대는 사람이 지향점을 안쪽에 두고 있다며 플라톤과는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바깥 쪽이든 안 쪽이든, 어쨌든 양자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중요). 모든 장소운동을 하는 동물의 특징입니다. 정지되어 있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사실이(방향성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도 일으키고 심리적 압박도 가하는 기제입니다.
왜냐하면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과 성령을 지도와 나침반으로 주셨습니다. 부활 이후(post Resurrection)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누가의 행전은 그런 방향성을 이렇게 맞추고 있습니다.
첫째, 밖으로 향하고 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고 누가는 행전의 처음을 기록합니다.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된 과정에서는 타향 각처에서 와 있던 사람이 동시에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적인 코이노니아로 더욱 더 많은 사람을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일곱 집사를 위시한 차세대 지도자도 세웠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은 순교를 하고 말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여파로 그리스도인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결과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 전통에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고 국제 감각도 겸비한 바울도 영입하는 결실이 있었습니다. 모두 부활 이후의 일입니다.
둘째, 안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어려운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 유대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다양한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는 그 구심축/중심을 바로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주장들을 했거든요. 그중에는 아예 유대교 전통을 모조리 무시하려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교 전통은 하나도 개혁하지 않은 채 부수적으로만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습니다.
셋째, 선행과 구제를 향하고 있다.
복음의 그와 같은 원심(밖으로 나가려는)축과 구심(안으로 들어가려는)축 사이에는 중요한 동선 하나가 그려졌는데 그것은 바로 선행과 구제라는 ‘일관성’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치 자체가 코이노니아(나눔)였다면 바나바처럼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나바처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다비다라는 과부 도르가처럼 삻을 선행과 구제로 매진하던 지역 여성도 있었습니다.
도르가 이야기 이후에 등장하는 고넬료 역시 이방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행과 구제의 덕목을 기초로 결국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연결되는 동선을 그려냅니다. 평소에 선행과 구제를 하더니 사도들과 만나게 되었더라는 식의 서술입니다. 이것이 모종의 (미로와 같았던) 방향성의 실체이며 초대교회가 봉착해 있던 미궁에서 출구를 향해 헤쳐나갈 수 있는 일관성, 즉 실타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람과도 같으신 성령이 주도하신 방향성의 실체입니다.
에필로그: 침묵의 소리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부하들과 달리 오디세우스가 몸을 묶고서 귀를 막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소리를 똑똑히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성이 부족한 자는 귀만 틀어 막으면 됩니다. 틀어 막았다는 그 믿음/신념 하나로 살아나가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죽음과 부활 이후를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이성을 지닌 오디세우스는 그 소리를 꼭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격동하지 않기 위해서 몸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몸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귀를 막고 싶으세요…아니면 귀는 막고 몸이 묶이고 싶으세요… 지금 어떤 처지에 직면해 계십니까.
부활주일 후 제 4일 | 미로에서 길 찾기. | 성서일과, 행 9:36-43. (c.f. 시 23; 계 7:9-17; 요 10:22-30.) (2013년 4월 21일, 2022년 5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