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선오브갓>(2014)에 관한 기고를 하나 냈다. 어떤 웹진의 요청에서였는데 영화 실제 내용보다는 ‘플롯’이란 개념에 대해서만 좀 언급했다.
종려주일.
이 ‘호산나’ 플롯의 핵심은 <배신>이다.
배신 해본 적 있는가? 아니면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가? 대부분 배신을 당했던 것만 말하지 자기가 배신한 건 잘 말하지 않는다. 특히, 누구보다도 배신의 방점을 찍었던 인물이 자기를 배신한 인물들만 손가락 꼽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배신자 유다.
성서의 고난 플롯을 주도하는 인물군은 바로 이 (1) 가룟 유다를 포함해 (2) 가야바 (3) 빌라도로 집약된다. 자기가 맡은 개인적인 플롯을 통해 전체적인 고난 플롯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은 각각 ‘로마’(세속/세계), ‘유대’(이스라엘), ‘제자’(교회)군을 표상한다.
가룟 유다를 오로지 마귀를 표상한다고만 말하는 관점은 매우 저차적인 것이며, 사실 그건 플롯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야기에 대해 무덤덤해질 정도로 다독을 해 온 이 ‘선오브갓’ 플롯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이 가룟 유다의 위치는 무엇일까?
오로지 ‘죽음’ 플롯만 중요할 것 같았으면 가룟 유다 플롯 없이 가야바-빌라도 플롯만으로도 그 죽음은 얼마든지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가야바도 빼고 그냥 로마군에 죽임 당하면 안 되는 플롯인가? 안된다.
(1) 빌라도 (2) 가야바 (3) 가룟 유다
이들 셋을 수난의 중요한 계층으로 촘촘하게 엮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외침이다.
“네가 당하라!”ㅡ마 27:4, 24
은 삼십을 도로 들고 달려온 가룟 유다를 향해 던진 유대교 제사장들의 말인 동시에, 그 유대인들을 향해 재차 빌라도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 면피의 태도의 중첩은 바로 저 (배신의) 계층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이 무죄한 자의 죽음에 자신들은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가룟 유다가 굳이 운명적 배신자로 끼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가 정말로 그리스도이면 어쩌나 싶은 이 교활한 유대인들(제사장군)에게 면피용으로 고용된 사수였던 셈이다.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그분을 그리스도로 인정했다는 암시에 이르고 있다. 즉, 알고도 죽인 것이다. (이 대목은 <선오브갓>이 아닌 <패션오브크라이스트>가 곧잘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성서일과 본문 마태복음 상의 가룟 유다는 어떤 악마의 화신이라기보다는 베드로와 똑같은, 불안하기만한 제자인 것이다.
그가 마귀라는 소리를 들을 때(요 6:70), 베드로는 사단이라는 소릴 들었으며(마 16:23), 그가 그리스도를 넘기는 동안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을 하고 있다. 이것이 마태의 관찰이며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는 생략된 모든 사후(事後)의 유다 이야기까지 복원해냈다.
베드로는 울었지만 유다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울지는 않고서 목을 매다는 제자.
그런가 하면 저 밖의 자.기.백.성.들.은,
“그 (무죄한 자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호언장담 하며 서 있다. 그가 처형될 때까지.
이것이 우리가 행한 그리스도의 1st Coming에 대한 대접이다.
따라서 ‘호산나’라는 연호는 이 총체적인 플롯 속에서 우리가 그분의 2nd Coming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라는 다음 플롯으로 공을 넘기고 있다.
가야바, 빌라도, 유다는 그리스도인 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대접했지만,
호산나, 즉, 이 갈댓잎들은 언제나 구름 속에서 도포자락 휘날리는 그리스도의 2nd Coming만을 기다리며 바로 곁에 있는 그리스도는 처형하는데 가표를 던지고 있다.
+ 본문: 마 27:21-26.
(cf. 마 21:1-11; 시 118:1-2, 19-29. 사 50:4-9a; 시 31:9-16; 마 26:14-27:66; 27: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