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은 모두 ‘관계’ 속에서 창설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중동 국가에서 발생한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느닷없이 뚝 떨어진 걸 믿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관계’ 속에 기원을 둔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은 자기문명을 창설한 자로서 대명사가 되었지만 아벨을 죽인 형으로서 존재합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해 마땅한 지명(地名)으로 회자 되지만 그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로서 존재했고 거기에도 ‘관계’란 게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국가요 민족이요 땅의 이름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 역경을 관계로 담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12아들들의 ‘관계’ 속에서 궁극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관계란 것이 누구는 에발산에 세우고 누구는 성산인 그리심산에 세우면서 심화되고, 또 굳어집니다. 그 갈림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이들이 바로 에발산에 도열한 자들인데, 하나 같이 열등합니다. 하나같이 서자들입니다. 르우벤은 서자가 아니었지만 타락한 자입니다. 그러면 혈통이나 도덕성이 기준인가? 그렇다면 스불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서자도 아니고 르우벤 같은 명시적 타락도 없었으니까.

분명 성경에는 한 공동체 내에서도 서열을 가르려는 강력한 노선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한 마디로 파격적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안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과연 당대에 이 예언이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지만 그리스도의 주된 사역지가 바로 이 지역이 됩니다(마 4:12-17).

이사야는 매우 구석구석 다양한 분야를 디테일하게 예언한 예언자인데, 그가 그 시절에 벌써 12아들들 가운데 이름도 거의 외워지지 않는 스불론과 납달리를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초대교회가 이 예언을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둡고 그늘진 곳을 비추신 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지만, 초대교회 성경 편찬자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를 비춰낸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들입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모할 것이지만, 나는 특별히 그리스도를 비춰낸 그 성경 편찬자들을 사모하고 닮기를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에필로그 | 이름과 땅

우우리는 서로를 ‘영남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호남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아니면 ‘충청도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서울 사람이라고 불리면 나은 편입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됨을 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오래되면 민족이나 국가 이름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땅의 이름으로 굳힙니다. 바로 그 땅이 그 사람의 기질을 담는 이치이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우리는 땅, 즉 흙으로 지어진 존재이며 우리의 이름이 ‘아다마’(흙)에서 온 ‘아담’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부득이 땅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 땅의 기질을 받아 타고나지만, 그 움직일 수 없는 기질이더라도 오직 그리스도가 비추시는 성령일 때 빛으로 해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2014년 1월 26일자 |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 | 사 9:1-8; 마 4:12-23, (cf. 시 27:1, 4-9; 고전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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