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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의 신학펀치. 이걸 보다 뜬금없이 “작지만 큰 교회”가 떠올랐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어떤 외부강사가 와서 유머라고 한다는 소리가
“<작지만 큰 교회>라는 간판을 단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태풍이 불어 ‘작’에서 ‘ㄱ’이 떨어져버렸다”며 자기 혼자 웃다가 간 에피소드다.

‘ㄱ’자가 떨어져나간 “작지만 큰 교회” 이걸 유머라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설교자들을 보니 원래 웃기는 사람이 있고, 웃기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심한 경우는 <한 방>을 준비하고서는 그 <한 방>을 터뜨리려고 아예 본문의 궤적까지 움직이는 경우도 보았다.

신학/Theology은 본래 Theo(하나님)에 관해 Logia(이야기)하는 분야로 정의되는 줄 알고 있다.
Myth(神)에 관해 Logia(떠벌이는) 신화/Mythology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이 <세속 프로그램>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밝히면 응원 받을 만한 일이다. 세속에 나가 Theo를 Logia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시적인 <전공> 타이틀을 걸고 두 사람의 젊은 학자 음성을 듣는 사실 만으로도 경쾌한 일이다.

특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학계 비평물들은 ‘머 이런 게 다있노?’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머니 위트니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서일까..?
그 날의 설교에서 기억이 나는 건 <‘ㄱ’자 떨어져나간 ‘작지만 큰 교회’> 뿐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작지만 큰 교회의 의미라도 남으면 좋으련만 <‘ㄱ’자 떨어져나간 ‘작지만 큰 교회’> 외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낸시랭의 신학펀치>에서 신학이 아닌 <낸시랭>만 기억에 남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에필로그 | 코미디아

「장미의 이름」을 들어 많은 사람들이 <코미디아/κωμῳδία>를 무조건 변증하려는 경향이 늘어났지만,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경이다. 그 자체에 변함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설마 평생 웃지 않으셨겠느냐? 왜 웃지 않았겠느냐? 그건 그의 ‘피’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물은 그냥 그렇게 고정된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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