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1-3

이처럼 한껏 용기를 선포 받고도 이스라엘이 내뱉은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사 49:4

시간의 경과 후에 발생하는 이런 소회는 수많은 구원의 증험을 간직했음에도 깊은 침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닮았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어떤 목적이 좌절 되었을 때에 깃들지만 ‘불행’에 관한 진정한 인식은 자기 자신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모를 때에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불행은 어떤 한 사물이나 사람, 혹은 환경으로 인해 닥치는 ‘요인’이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거나 반복될 때 우리는 인식의 미아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지배가 본격화 되면 당초 좌절의 원인은 사라지고 ‘불행’이라는 의식만 남는 원리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시작, 중간, 끝, 이들 세 매듭을 놓친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잠긴 인식의 마비를 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 그것이 첫 번째 관문이라는 점에서 —일 것입니다. 회개는 일종의 급전(unexpected)이기 때문입니다. 돌이킴이기 때문입니다.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 지점에 대한 방향 감각이 없어 인식의 미아가 된 상태에서 방향 감각을 무엇으로 복원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킴 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창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과학과 경쟁하려는 식의 창조— 지구과학, 생물학 같은 —가 아니라 모태의 기억으로서 창조를 말합니다. 예컨대 어머니의 태중에서 안락함이나, 어머니 품속에서의 안락함은 같은 것입니다. 또 성인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락함도 같은 회복력에 기초합니다.

이런 원리에 기초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았다”, “지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왜? 어머니 품의 안정감이 모태의 인식에 기반하듯이. 혹은 그 반대.). 그리고 안락함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좌절을 철회할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기원을 인식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에필로그 |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그러나 상기의 과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난(begotten) 사람일 때 가능한 얘기입니다.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 | 사 49:1-7, (cf. 시 40:1-11; 고전 1:1-9; 요 1:29-42.) | 2014.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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