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사님은 좌파일까? 우파일까? 이 시대 목사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일만큼 부담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 교회 신도 중 절반은 잃을 테니.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나의 경우는 이념성애자에 가까운 목사들이 성령 세례보다도 자신이 젊었을 때 받았던 이념 세례를 더 추앙하면서도 정작 자기 목회에서는 자본적 양상에 철저한 것을 눈뜨고 보기 힘들어 하는 편이니 우경향인 게 확실하다. 하지만, 설교에서 공공연하게 “한나라당 안 찍으면 나라 망한다”고 떠벌이는 부흥강사들 데려다 강단에 세우는(이런 짓을 실제로 봄) 한심한 교회나 목사 역시 전자만큼 혐오하는 것을 보면 좌경향인 것도 같다… 라고 말하면서 중도적 입장으로 연막을 치는 편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 종교적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십자군 시대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라틴의 교황이었지만, 그 전쟁을 선동하고 모병을 위해 돌아다닌 사람들은 오늘날로 보면 전도자 즉 부흥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진리를 표방하면서 사실은 이념 세례 받은 값을 톡톡히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때 모병에 응했던 ‘믿음’ 충만한 사람들은 십자군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약탈을 보장 받았다. ‘믿음 충만한’ 이들은 대개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이등의 기사계급, 장사꾼, 기근에 시달리는 일반 계층.., 모두가 결핍과 이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부류였다. 지금 이 시대처럼. 우리 사회의 세습에서 밀려난 기독교도들이 적극 참전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유대인까지 학살했다. 이슬람교도를 아무런 가책 없이 식량으로 사용한 보고도 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같은 그리스도교 영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점령해 들어가 라틴 교회 십자가를 꽂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처럼. 우리 사회의 세습 교회들도 약탈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의 경우 동성애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사회주의식 거짓 희년 문제 등 이 사회의 십자군 전쟁에서 교전해본 경험이 있는데, ‘중도’ 사관이라는 허망한 역사 중립 개념으로 십자가 정체성을 환원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일임을 언제나 절감했던 경험이다.

우리 목사님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십자군 전쟁의 결과를 르네상스 세계로 진입하게 된 계기로 치적하는 것은(십자군 전쟁은 중산층 세력의 팽창으로 이어져 중세의 종말을 앞당겼다) 마치 일제 시대 덕에 우리가 근대 개화기로 진입했다고(조선 인구 절반에 달하는 노비 제도가 해체되고 문맹률이 급속히 떨어진 것은 이 시점의 일이다) 말하는 ‘여우의 신포도’ 비유에 나오는 여우와 같은 말일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는 안디옥 교회의 발상지였던 터키 땅의 99%를 이슬람화로 만들었다면, 우리나라 복음주의 세습 교회의 급성장은 안티-기독교(대부분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자녀)를 사생아로 낳았다.

안디옥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스타일의 복음을 전해준 사실상 ‘처음 교회’였다(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감시만 하고 있었다). 그런 안디옥 교회의 성지가 이슬람화 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안디옥 교회의 땅(지금의 터키)이 이슬람의 토지로 변해 안디옥이 그리스도교 국가 아르메니아에 박해하는 결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약 150만 명 정도의 새로운 학살도 발생했다. 안디옥 교회의 영지가 십자군에 짓밟힌 것이나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이 좌와 우를 포섭하는 역사의 순환구조이다. 그래서 그 상잔의 비극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상잔의 비극과도 형식 면에서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자, 이리 나와 내 정의의 칼을 받아라—.” 자고로 좌(左)와 우(右)란 자기 이념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우리 목사님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오늘 성서일과 제1 독서 본문은 바로 그 정의(正義)가 깃드는 공간을 지목하고 있다. 그곳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 있는 곳이다.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사야서 42:1-9

학술적으로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는 알지 못한다(기독교에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지만, 구약/타나크 자체로는 미스테리의 인물상). 학문적으로도 이념을 달리 하는 것이다.

<한국사> (교학사), p. 313에 이우근으로 실린 사진. 이 사진에 나타난 계절 따위의 이의 제기로 이우근이 아니라 국군이라는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나는내가 붙드는 나의 종‘으로 학도병 이우근 그리고 이승복과 같은 소년들을 지목하는 바이다. ‘수난 받는 종’으로서 모상인 그들이 ‘남한의’ 순교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순교자인 까닭이다. 우리 시대의 “상한 갈대”, 우리 모두의 “꺼져가는 등불”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우리 역사의 ‘수난 받는 종’을 역사적이지 않다며 삭제를 시도하는 정치인도 많다. 가령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이우근의 사진이 실제로는 ‘이우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거나 이승복의 동상을 제거하려 했던 시도이다. 사진이 오류였다고 학도병 존재가 사라지는가? 우리나라에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 없었던 적이 있던가. 그 갈대와 등불은 제주에도 있었고 광주에도 있었고, 안디옥 교회나 콘스탄티노플에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다.

에필로그

우리 목사님이 좌파인지, 우파인지를 가려내려면 그 목사가 받은 세례가 무엇인지를 보면 명확하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세례인지, 이념의 세례인지. 다시 말하면 세례는 추상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이념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 2014.1.12일자 | 정의(正義)는 어디에 깃드는가. | 사 42:1-9, (cf. 사 42:1~9; 시 29; 행 10:34~43;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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