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총선, ‘기생충’ 그리고 부활

4·15총선, ‘기생충’ 그리고 부활

사물에는 서명(signature)이 있다. 그것은 신호등이나 먹구름 같은 명사적 사물만이 아니라 동사적 환경에도 작용한다.

움베르트 에코는 이르기를 호라티우스(Horatius Cocles)가 야만족을 도시 국가 경계선으로 밀어붙인 덕에 영웅이 되었는데, 그것은 물의 흐름을 가르고 다리로 넘어오려는 신성모독을 근절했기 때문이며, 이는 다리를 대주교 허락 없이는 건설할 수 없었던 서명과 통하는 것이로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역시 루비콘강을 건널 때 신성 모독을 범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 것과 통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명자의 서명을 해독하는 것이 해석자의 역할이다.

따라서 나는 2020년 성금요일(Good Friday)을 지나는 이 시점에, 부활일을 앞둔 이 시점에, 그리고 무엇보다 4·15총선에 직면한 이 때에 대한민국에 나타난 서명자의 서명을 해석해두려고 한다.

그 서명은 ‘기생충’이다.

영화 ‘기생충’ 축하한 날, 우한 폐렴 첫 사망자 발생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알려온 수많은 기호와 상징이 있었는데도 하필이면 이 시기, 온세계에 ‘기생충’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다리를 침범해 밀고 들어오는 신성모독을 반영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서명의 각인을 우리에게 선사한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이 다름 아닌 <플란다스의 개>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기호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 2000년작

오늘 내가 부활의 절기를 목전에 두고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기생충이라기보다는 <플란다스의 개>(1872)에 나오는 루벤스 작품이다. 그것이 우리의 기생충을 해석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위다의 원작 A Dog Of Flanders (1915년판)

루벤스는 살아생전 그리스도의 ‘들림’과 ‘하강’이라는 두 작품을 연작으로 남겼다.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주인공 네로는 이 루벤스 작품들 가운데서 ‘하강’을 보기 위해 그토록 애타게 고대한다.

벨기에의 플란데런이라는 지방에 사는 15세 소년 네로(Nello)는 두 살에 고아가 된 후 외할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도와 우유 배달을 하면서 화가가 되려는 꿈을 키워나간다. ‘플란다스의 개’ 파트라슈는 고물상에게 갖은 혹사를 당하다 버려진 개다. 네로와 함께 산다.

1975년 리메이크 일본 후지TV

화가가 되고 싶은 네로에겐 소망이 하나 있다. 인근의 안트베르펀(Antwerp) 대성당 제단화를 한 번만 보는 게 소원이다. 20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재단화이다. 보고 싶으면 교회 가서 보면 될 텐데 왜 교회에 걸린 그림을 한 번만 보는 게 소원일까. 돈을 내야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트베르펀 대성당

제단화(Altarpiece)란 세 개의 패널로 된 예배용 성화 그림을 말한다. 이 예배용 그림을 보기 위해선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종교뿐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을 반영할 것이다. 원작자 위다(Ouida)는 젊은 우리의 영화 감독 봉준호처럼 사회 부조리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네로는 매우 정직한 아이였다. 하지만 편견에 시달렸다. 네로의 유일한 친구였던 풍차 집 외동딸 아로아의 아버지는 고아인 네로를 싫어한다. 그래서 그 풍차 오두막 곡물 창고가 전소되었을 때 방화 누명을 네로가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아로아가 적극적으로 누명을 벗겨주었지만 그럴수록 아로아 아빠는 네로를 혐오한다.

화가가 되는 게 꿈인 네로는 미술 대회에 나가려고 한다. 우승하면 그림 그릴 도구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미술 대회에 출품할 그림 그릴 도구가 없다. 그래서 널빤지를 주워 석탄으로 그려 출품한다.

외할아버지 한스와 살아가는 네로

네로의 상황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우유 배달 일도 끊기고 성탄절 앞두고는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었다. 집세를 낼 수 없어 오두막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마지막 희망이던 그림 대회 결과를 보러 갔지만 당선자 명단에 네로는 없다. 모든 희망이 무너진 것이다. 배고픈 네로와 파트라슈는 마을에 가서 구걸을 해보지만 야멸차게 거절당한다.

그렇게 버림받은 네로와 파트라슈는 눈보라가 치는 길에서 지갑을 하나 발견한다. 지갑은 친구 아로아의 아버지 지갑이었고 거의 전 재산에 가까운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정직한 네로는 아로아의 집에 지갑을 건네주고는 눈보라가 치는 길을 걷는다. 추위와 굶주림에 위태로움을 느낀 네로는 파트라슈를 오두막에 두고서 계속 걷는다.

모든 희망을 잃은 네로는 눈보라 치는 거리를 지나 성당에 다다른다. 평상시는 문이 잠겨 있으나 그해 크리스마스만은 특별히 개방되어 그림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성당으로 들어섰으나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달빛이 제단화를 비추고 그림의 위용을 드러냈다. 네로가 드디어 그림을 보게 된 것이다.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을…
오두막에 두고온 파트라슈도 때 맞추어 네로를 찾아왔다.
함께 그림을 바라본다.

루벤스의 작품을 보는 네로와 파트라슈

그토록 소망하던 그림을 본 네로는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됐다.”

뭐가 됐다는 것일까…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12–1614

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이 그림을 연작과 함께 남겼다. <십자가에서 하강>(The Descent from the Cross)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작품은 1612–1614년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2-3년 앞서 그린 <십자가로 들림>(The Elevation of the Cross)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e Elevation of the Cross 1610–1611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 ‘들림’ 작품에 나타난 거대한 근육들의 움직임을 마치 해부학에 기초한 미켈란젤로의 회화처럼 간주하고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들림’ 받는 그 무게감이 핵심이라고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우측의 말 탄 장교의 지휘봉은 그리스도의 못 박힌 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목하거나, 좌측 젊은 여성의 눈은 그리스도의 눈과 대각선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거나, 기하학적 구도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십자가 뒤의 (포도) 넝쿨은 생명나무를 상징한다는 식의 결론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근육이 과장되다

두 작품의 제작 시기는 불과 1-2년 정도 차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면 두 작품의 구도나 이미지는 상호 연관성에 우선 종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게감’은 내릴 때 더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강’에서의 무게감은 ‘들림’에서 들어 올리는 남성들의 근육들이 부과했던 무게와는 달리 예수의 시신을 받아 내리는 성원들의 나약함에 의해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들림’ 때와는 사뭇 다른 그리스도의 창백한 피부색은 전혀 다른 의미로서의 무게감을 보태고 있다.

사도 요한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힘겹다. 전작의 근육 남성과 대비속에서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의 강력한 대비는 의도적인 연작으로서 더 기능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들림’에 나타난 구도와 구성은 하나 같이 모종의 바로크식 ‘퇴폐’를 상징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가령 ‘들림’에서 좌측의 젖 물린 여성은 ‘하강’에서의 좌우 배치된 여인들의 경건한 임신과는 달리 퇴폐적이다. 우측의 장교가 타고 있는 말의 갈기 또한 십자가와는 걸맞지 않은 사치스러운 웨이브를 지니고 있다.

놀람보다는 기피. 아이를 보라.
말 갈기의 웨이브는 좌측 여성만큼이나 퇴폐

따라서 우리는 네로의 “이제 됐다!”는 그 말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찌하여 네로가 ‘승천’(들림)이 아닌 ‘하강’ 속에서 탄성을 발하였는가….라는 상대적 물음속에서 확정지을 수 있는데, 바로 ‘하강’(내림)이 네로에게는 참된 동질감이었다는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한 장면

또 그것은 봉준호가 자신의 <플란다스의 개>를 부조리한 지식인이 양심을 판 죄책을 드러내는 용도로 건물 아래로 던져 죽여버리거나 보신탕에 소진한 것과도 상대적인 것이다.

네로는 자신의 ‘플란다스 개’와 함께 ‘하강’ 아래서 잠들지만,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는 개에서 ‘괴물’로, 괴물에서 다시 ‘삼겹살’(옥자)로, 삼겹살에서 결국에는 ‘기생충’으로, 남용스런 퇴행을 일삼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개가 기생충으로 부활을 한 셈이다. (봉준호는 개를 개로 본 것일까?)

이와 같은 기호와 상징의 퇴행은 우리 집단 인식의 퇴행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것이 기생충을 서명한 서명자(a signer)의 실체다. 따라서 집단적 서명 행사라 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마지막 자유선거가 될 지도 모를) 총선의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눈으로 선명하게 봤다.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죽은 네로와 파트라슈

거액의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려 죽다 살아나면서 네로의 품성을 뒤늦게 깨달은 아로아의 아버지가 네로를 찾아 달려왔고, 널빤지에 목탄으로 그린 놀라운 그림을 본 저명한 화가가 제자로 삼기 위해 네로를 찾아왔지만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렇게 네로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았지만, 기생충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가치 하나를 남겼다.

“이제 됐어.”
“이제 봤으니까 됐어.”

네로는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생충을 보았다. 기생충이 우리보다 깨끗한 줄 알뻔 하였는데 눈으로 명확히 본 것이다.

“이제 봤으니까 됐어.”

이 도식이 부활의 유서 깊은 전형이 되었다.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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