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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EGO & ECO.
위 일러스트를 이해한 사람은 주로 Eco쪽에 찬사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환경을 파괴한 인류가 지닌 Ego(나) 중심 사고를 고발하고 Eco(생태) 중심 사고로의 전환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Lynn White같은 학자는 그리스도인의 그릇된 성경관, 특히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마저 그 파괴에 앞장섰다고 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 Ego를 그릇되게 이해한 자들이 Eco마저 오해하는 것이다. 환경과 생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선 영어 “I”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 Ego는 본래 “나”를 뜻하는 희랍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반면 영어 eco- 접두사가 될 Eco는 “집”을 의미하는 희랍어 οίκος에서 왔다. 환경이나 생태라는 말은 <집>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런데 인류는 신으로부터 지구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 다른 종들 <이름>은 인류가 선사했다. 사람의 <이름>을 신이 지어준 것과는 달리 다른 종의 <이름>은 사람이 지었던 것이다. 이는 신의 용인과 묵인 아래 그리 되었다(c.f. 창 2:29). 여기까지가 Eco의 본원적 형식이다. 하지만 인류는 종의 <이름>만이 아니라 자기 신들의 <이름>까지 짓는 오류를 범했다. [유대인은 자기 신의 이름을 신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다는 형식을 취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제3계의 침범을 우회하려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이름>은 <법>의 형식에 다다른다. 인간은 <법>으로 살상하며, 그리고 그 <법>은 <이름>으로 인간을 살상하는 형식인 것이다. 진정한 Eco(환경)의 파괴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름>(nomen)이 <법>(nomous)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신께서는 자기 이름을 법 파괴적인 <이름>으로 밝히셨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다”(I AM WHO I AM) 또는 “나는 …이다”(Ego Eimi)라고 이르셨기 때문이다. 즉 그 이름 자체가 바로 인 것이다.
그 이름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자아(ego)를 통해 우리 심장에 들러붙고 말았다. 인류를 지은 자의 이름도 Ego요 인류의 이름도 Ego요 그것을 순환케 한 이의 이름과 삶도 Ego라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창 1:28의 “정복”이 정복이 아닌 “지킴”으로서의 카바쉬였음을 다시 주석한다. [2012.7.2.일자]
프린서플 | 어떤 집을 원하는가.
아담에게 에덴동산이라는 환경이 ‘집’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은 바로 Eco로서 환경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집은 어떤 집이며, 또 어떤 집이기를 원하십니까? 참된 집은 다음 세 가지를 충족합니다. 
공간.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를 우상의 도시로부터 떠난 인물로 이미 전제를 하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종교적 행위로 보지만 지구상의 모든 세대는 자신들의 아버지 집을 떠난다는 점에서 그 의미의 궁극은 세대의 교체를 의미 합니다. 공간은 교체를 이룬 각 세대가 소유하게 됩니다

시간.
집은 기억을 보존합니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어머니를 기억하고 형제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은 환경은 결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집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집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나는(Ego) 존재해야 집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 집에 있다 하더라도 Ego 즉 나의 자아가 거주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닙니다.
프린서플 |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집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가 집을 지킬 것인가. 어머니가 지키려니와 어머니마저 없으면 누가 지킬 것인가. 형이 지킬 것이거니와 형마저 없다면 <나> 즉, Ego가 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家長) 없는 집이란 없거니와 이리하여 <나>가 없으면 <집>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일러스트 Ego라는 좌측 그림은 Eco라는 우측 그림에 언제나 선행한다 할 것입니다. 어떤 집인가 이전에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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