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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사순절
사순절(四旬節, lent, Quadragesima)이란 교회력상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한다. 이 기간을 영어로는 Lent라 하는데, 그 어원은 만물의 소생이라는 의미에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요한 3:16)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순 시기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절 전 40일(사순, 四旬, 6번의 주일은 세지 않는다)의 기간 동안 지킨다. 이날에는 금식 등 자기 절제와 회개를 집중적으로 한다. 유월절(무교절) 기간에 있었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절기인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에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시행되고, 금식과 고행 등을 통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므로 주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의 기독교 강요 4장 19-29). 이에 따라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84회 총회(1999년 9월)에서는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 교회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결의하여 사순 시기를 지키지 않고 부활절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의 의식 색깔은 자색이며,다만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붉은색을 사용한다. (c.f. wikipidia.org)
프린서플 | 배격하고 거부하고 거절하고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이 사순절 절기를 과거 중세교회의 과장된 의식과 거기서 오는 부작용을 겨냥하여 이미 폐기를 하였거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하며 배격하고 거부하고 거절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을 의식화 하지 않는 현대교회 대부분이 사순절에 소홀한 이유는 이를 폐기했던 개혁주의 입장을 쫓고 있거나 그런 어떤 유사 이념을 신봉해서라기 보다는 개교회 자신들의 이벤트나 행사로서 장장 6주에 달하는 그 심각하고도 비장한 정서적 기간을 유지한다는 게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현대의 사순절은 현대교회의 연간 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봄철 대심방>, <봄철 헌신예배>…등 중단기 준비와 기간을 요하는 각종 행사와 시즌을 강력한 라이벌로 두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력이란 오랜 기간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 그리고 구약/유대교의 전통 절기의 재현을 구현하고자 하는 역사적인 노력입니다. 의식이 과장된 전례가 있다 해서 폐지의 대상인 것도 아니고, 사람의 관심이나 교회 유지와 경영을 위해 계발된 프로그램에 대체 당할 그 어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가령,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이 ‘세 개 복음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세 개의 교회’에서 이미 공식적인 그 어떤 의미화로 존속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교회력은 이같은 공적 실천 속에서 기념이 되어 온 교회의 역사 자신입니다.
사순절은 돌로 떡 만드는 것을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영을 물질로 만들어내려는 모든 이단을 배격하는것이 사순절 기간이 지닌 첫째 의미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땅의 사람으로 사심으로써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로 떡을 만드는 영성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권세와 영광을 거부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마귀는 천하만국과 영광을 권하면서 불법적으로 임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자신이 취득한 합법적 권세와 영광을 권합니다(c.f. 욥기 1-2장).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불법적 영광만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합법적 권세와 영광까지도 거부하신 것입니다.
사순절은 허영을 거절합니다.
공중으로 뛰어내리길 권하는 마귀가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올라가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권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실명으로 직접적으로 지목하고 것은 막연한 허영이 아니라 전통적이고도 명시적 가치가 가리우고 있는 허영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 의식이 아닌 실천으로
중세교회는 의식과 예전을 실천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의식과 예전의 타닥을 가져왔지만 개혁주의자들은 그 실천의 미명하에 의식과 예전을 제거함으로 자기실천에만 매립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제 삶에서의 실천도 중요하고 그 기초를 표명하는 건전한 의식과 예전도 필요합니다.

* 2013.2.17.일자분 (설교음원 파일은 추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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