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


  👁 29명의 독자가 공감하셨습니다 

휴거, 베리칩, 바른 종말론


프롤로그 |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예수 재림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성경 예언이 1992.10.28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당일 예언은 빗나갔고 리더였던 목사는(이장림) 구속되었다. 구속 된 사유는 예언이 빗나가서가 아니라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는데 그의 자택에서는 1993.5.22 만기 도래되는 환매채와 수표 1억9300만원, 그리고 미화 2만6700불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신도중에는 퇴직금을 모두 바친 철도공무원, 아들과 가출해 선교회에 합류한 주부, 여기에 합류를 막는다고 음독자살한 여고생, 그리고 심지어 ‘들림’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낙태를 한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 사진 설명: 당시의 종말은 북한의 남침과 연계되어 나타날 것으로 주장되기도 했는데
                         목사들 중에는 벌거벗고 그것을 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사야처럼?…

               * 사진 설명: 이후 92년 11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소형광고로 사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프린서플 | 바른 종말론

휴거(携擧)라는 한 현상에 몰입했던 이 단체의 핵심 리더였던 이장림씨의 목적이 단순 금전사기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도 없는 어휘인 이 ‘휴거’라는 말이 다름 아닌 이장림 그 자신이 과거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소속 번역자였을 정도로 지식에 문외가 아니었을 그가 1978년 Ernest Angley 소설 Raptured를 번역하면서 휴거라는 한자식 표기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설류를 우리는 일종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합니다. 성서 자체가 이러한 묵시 환경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유래가 깊은 것이지만,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얼마든지 또 그런 혼란은 반복될 것이며, 실제로 강력한 스마트 환경에 진입한 오늘날도 이미 도처에서는 동종의 현상들이 포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묵시를 이렇게 계시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의의 파괴.

종말의 주제는 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왜 종말이 오는 지, 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말은 실제로 유대교 형성의 배경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처음’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맞지만 그 창조주를 언제 기억해냈는지가 중요한데 그 때가 바로 ‘종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도 한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님 공의에 관한 포괄적 침범을 다룬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모든 죄상들 역시 공의의 붕괴를 기록한 것이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의 심판.

심판은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미선교회>의 실패는 휴거를 마치 심판 회피의 거점으로 축소한 데 있습니다. 심판의 장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십자가 도상입니다. ‘들림’도 그곳에서 발생합니다. 계시록을 이 전제와 분리시켜 읽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심판대, 또 다른 예수를 소개 받게 되는데 십자가 도상과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더 강도 높은 종말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단 되기 십상입니다.

공의의 회복.

성서가 남긴 묵시와 작금의 묵시현상 간 가장 큰 차이점은 ‘회복’을 말하는 가에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회복을 의미했으며, 광야 성소도 회복이었으며, 다윗 성전도,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 역시 회복을 기표로 갖는 종말이었습니다. 구속사적 종말은 언제나 공의의 회복을 목적하고 재연되어왔습니다. 파괴와 불안이 아닙니다.

에필로그 | 반복의 도그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근본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 마디로, 성례전의 ‘반복’에 실패한 자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초림 이후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종말과 심판은 바로 이 성례전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말에 가서도 보전해야 할 최선의 도그마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대목은 마가와 마태복음에 공히 나오는 본문인데 유독 여기 누가복음에서 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아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왜 “모든 나무”가 추가된 것일까. 그것은 지정학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만의 독점적 사건으로서 종말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종의 반복을 고려한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020020921901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02&officeId;=00020&pageNo;=19&printNo;=21988&publishType;=00020
http://history.khan.kr/176
http://wnewskorea.cafe24.com/bbs/board.php?bo_table=weekly_issue≀_id=199
http://ndarticle.joins.com/pad/2012/10/25/20121025194415390.jpg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Comments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헤르메네이아 미문 (美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