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사순절 (4/40) 공유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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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순절 (4/40) 공유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름

 
 
* 하나님의 이름을 공유할 수 없음에 관하여

 

매일묵상/ 2016년 2월 13일 토요일

 
본문: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ㅡ요한복음 12:27-36.

 
관찰:

1.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28절)
2.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35절)

 
묵상:

3. 아버지의 이름을 묵상함.

 
느낀점:

4. 네 개의 복음서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총 8회 나오는데,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를 가리키는 누가복음 한 곳을 제외하고 7번 모두가 요한복음에서 나온다. 위 본문은 그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한다. 대체 왜 요한복음에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말이 이토록 많이 나오는가?

1. [눅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2. [요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3.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4.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5.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6.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7.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8.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해설:

5.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 포함된 문장들은 어떤 요한복음식의 수사(rhetoric)로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고유한 이름을 상정하고 있다.

이것을 성명신학(the Name Theology)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구약신학의 용어다. 구약학의 거장 폰 라트(von Rad)가 일찌기 신명기 신학의 한 특징으로 소개한 것이다. 예컨대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나서 그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기도했던 논조가 그것이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는데 기껏 성전은 왜 지었느냐? 그래서 그곳은 ‘이름’을 모셔두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전신학(Temple Mission)성명신학 말고의 본질일 수도 있고, 성전신학에 대한 대항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구약성서 자체에 그러한 반제가 ㅡ성전에 대립하는ㅡ 지나고 있고,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경우도 이러한 신학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cf. 스데반의 순교 직전의 설교를 보라)

이 글의 전 회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기 에덴동산이 아닌, 아브라함을 위시한 족장시대가 아닌, 출애굽 공동체 야웨 신앙의 전통에 근간을 두고 있다. 구속사 신학은 여기서 주어지는 이름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이것이 그 동안의 모든 (창조를 포함한) 전역사를 소급하는 이름이라는 테제를 펼친다. 어떻게 미래가 과거를 소급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명신학의 조예가 얕은 사람들은 대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교를 흡수한 것이라고 하거나(왜, 야웨가 나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인식된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니(가나안의) 같은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기에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연신에서 파생된 정도로 규명하고 싶어 한다. 이때 단골로 등장하는 게 바울의 인식론적 하나님이다(로마서). 그러나 성서는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바로 이 요한복음이 대표적인 예이며, 그 성명신학을 이어 받은 유일한 복음서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보전할 아버지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구약의 신명기 계열 전승에서 확립된 모세가 받아낸 그 이름을 토대에 두고 있다.
그 이름 YHWH는 존재론적으로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며, 인식론적으로는 ‘함께 계신 분’(I WILL BE)이다.
바로 이 이름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I AM(나는 ____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다시 말해서 결국 그 ‘아버지의’ 이름은 성전되신 예수의 몸에 보전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실천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먼저’ 계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받은 그 이름이 과거의 이름의 변형이나 보완이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웠던 것과 일반이다.
그 이름의 서열을 말할 것 같으면, 과거에 통용되었던 이름들 ㅡ이를 테면, 엘로힘(אֶלהִים,하나님), 샷다이(אל שדי, 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룐(עליון.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ㅡ 보다 압도적으로 고유한 이름이 되는 원리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처럼 그 신명(神名)을 직접 받지는 못했지만 “여호와 이레”(I WILL BE)라고 지르던 탄성 속에 이미 임했던 이름이다.
에덴동산에 쫓겨난 아담이 첫 아이를 낳고서 불렀던 이름이기도 하다(cf. 창 4:1).

그런가 하면 창세기 1장의 만물의 창조를 주도한 동사(hayah, TO BE)로서 임한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달리셨고(Crucifixion), 그리고 그 이름으로 우리를 지켜내신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ㅡ요 17:11.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ㅡ 요 17:12.

모세와 그의 공동체는 이 이름을 보전하기 위해 모음을 모두 제거하고 자음만 후대에 전수하였다.
제3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상숭배, 즉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의 본질적인 침탈은 대개 제 3계의 훼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이다.

아무렴 그 누가 (대놓고) 다른 우상에게 절을 하겠는가?
이름을 찬탈한 그 우상 그 하나님에게 절을 하지.

 
결단과 적용:

6.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리라.

 
기도:

7. 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할 능력을 주소서.
너―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소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디 보전하소서.

 

cf. Lectionary, Saturday (February 13, 2016): Psalm 91:1-2, 9-16; Ecclesiastes 3:1-8; John 12:27-36.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 새교회 새목회 (2013).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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