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지닌 기질을 통해 만물의 순환 원리를 예측하거나 규정하는 행위는 미신 행위이다. 고대에는 동물의 배를 갈라 내장의 도상에서 신점을 치는 미개한 행위가 성행하였다. 하지만 동물이 지닌 기질에서 기호를 추출해 사물을 읽어내는 일은 미개한 행위도 미신 행위도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관조 행위이다. 성서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동물과 그 역할은 이런 범주에 해당한다.
올해는 소의 해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은 ‘소띠’가 아닌 ‘예수님 띠’라고 말하겠지만, 2021년을 맞이하여 ‘소’라는 동물로 읽는 사물의 기호에 관해 몇 자 남기려고 한다.
일반적인 기호
고대로부터 소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남성적 생산력의 상징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태양과 비, 폭풍과 벼락을 가져오는 힘으로서의 건조함과 습윤의 원리로 연관지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고대의 오랜 관습이다. 특히 신년에 소를 잡는 행위를 겨울의 죽음과 창조/생명력의 탄생으로 여겼다.
고대 문명 수메르에서의 모든 제례 의식이 소를 매개로 치러졌다. 의인화된 소는 일종의 문지방 수호신으로 보화의 상징이었는가 하면,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바로 ‘빛의 황소’였다. 고대 중동에서 숭배된 이 황소는 하늘 공중의 커다란 고랑을 지나가는 ‘하늘의 황소’로 신화화 되었다. 그들의 신 아슈르와 아다드는 이 하늘 황소를 타고 다니는 신이다.
고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도 소에 관한 신화가 발달해 있는 것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역시 소를 우상시 했음을 방증한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대지의 신은 황소를 좋아한다. 땅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황소가 뿔로 대지를 들이받아 생기는 현상으로 알려졌다. 크레타 섬에서 역시 황소는 번식력의 상징이었다.
종교적인 기호
힌두교에서의 소는 소 자체가 신이다. 현대의 인도에서도 살아 있는 소가 신으로 숭배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힌두교의 소는 힘과 풍요의 상징에 이어 속도를 상징한다. 이는 힌두교의 다양한 신이 황소를 타고 다니는 신화와 관련 있으며, 풍요의 신 인드라의 표면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소는 자아(ego)를 상징한다. 특히 도덕적인 자아이다. 불교가 형이상학적 종교 같지만 죽은 자들의 신 염마를 소로 표징한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맥락이 비슷하다.
이집트 신 아피스와 오시리스의 형상 또한 소다. ‘므느베스’는 이집트에서 숭배 받는 소를 일컫는 명칭이다. 또한 이집트의 고위급 신 라(Ra)는 하늘의 황소라 불리면서 매일 같이 천공의 여신 누트를 잉태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유대교는 비(非) 시각적인 종교 특성과는 배치되게도 여러 동물과 함께 소가 자주 등장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배의 대상이 되거나 신전의 장식물로 활용된 사실을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교가 ‘야웨를 이스라엘의 (황)소’로 간주하였다는 상징학 관련 보고가 있지만, 이는 면밀하게 다루어져야 할 일이다. 이제부터 언급할 성서에서의 ‘소’에 관한 이해는 양가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에서의 기호
국가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인 모세에 의한 법전 수여의 장면이 다름 아닌 ‘소’에 대한 숭배 장면과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유대교가 단순히 소를 숭배했다고 규정할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소를 숭배하였다는 사실보다는 소를 숭배하는 제의를 거부하는 장면으로 더 기능하기 때문이다.
상기에 열거한 소에 대한 문화/종교적 기호를 읽다 보면 모세 법전의 수여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이 난데 없이 ‘황금 송아지 상’을 제단에 올린 근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모든 문명에 성행했던 소 숭배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그 중에서도 이집트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분열했을 때 다윗 가문에 반기를 든 북 왕조의 설립자 여로보암이 마치 모세처럼 이집트에 망명했다 돌아와 벧엘에 아예 송아지 제단을 세운 사실은 모세의 법전에 반기를 든 행위라기보다는 (아론의) 한 전승으로서 송아지 신앙에 기초했을 것이다. 예루살렘과 경쟁하려는 조처였다.
그러나 소에 관한 전승의 잔재는 근절되지 않았다. 송아지로 구성한 벧엘 제단을 이교도 취급하며 적대적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송아지 상은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 고대 이스라엘은 송아지 상을 천사의 형상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대하4:6).
신약성서에서의 기호
소가 죽음의 기간(겨울)을 몰아내고 창조/생명력을 표지한다는 사실은 신약의 시대에도 도입된 상징 이해이다. 소는 한마디로 출생의 도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다(눅 2:7)는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이 구유를 ‘말’ 구유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소’의 구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누가에 따르면 목동들에게 천사가 말하기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 하였는데 표적은 아기가 아니라 구유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 1:3
이사야의 이 예언에 따르면 그 임금을 알아보는 생물은 소 또는 나귀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성탄절 동화에서는 구유의 아기 예수 곁에 (소는 없고) 말 따위만 등장하는 것과 달리 유서 깊은 옛 도상에서 소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소는 누가복음의 상징이다. 마태복음은 날개달린 사람으로, 마가복음은 날개달린 사자로, 요한복음은 독수리의 상징으로 읽으려는 방식은 복음서 이해를 위한 오랜 전통이다. 1세기 초 활동하던 교부 이레네우스가 네 개의 복음서를 네 생물체와 연결시켜 설명한 이래로 네 복음서의 주제에 관해 활발하게 다루던 메타포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소는 누가복음의 상징일까? (소) ‘구유’에 관한 언급 때문일까? 그보다는 도입부의 이야기가 제사장 사가랴의 이야기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사람은 목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전을 떠나지 않고 있던 노인들(시므온과 안나)이었음을 상기할 것이다.
제사장은 소를 잡는 직무이다. 히브리서에서 대제사장 자신의 희생이 소의 희생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첩경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세례로써 그분을 세상에 드러냈을 뿐 아니라 목 베임당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는 이 세례 요한을 제사장의 아들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소다.
소에 관한 궁극적인 기호
그러나 소에 관한 진정한 기호는 정교한 의미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탄신을 표지하며 말하기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았다”고 하였을 때 일컬은 ‘소’는 쇼르(שׁוֹר)를 말한다. 쇼르는 황소 파르(פַר)와는 다르게 수소를 이르는 말이다. 이 쇼르가 나귀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나귀는 종교적 의미에서 ‘더러운’ 동물이다. 나귀(ass)가 오늘날에도 문란한 엉덩이(ass)로서 몸매 자체를 상징하게 된 것은 종교적 이교도를 상징했던 사실에 유래한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선교에서 ‘부정한’ 고기와 ‘정결한’ 고기를 한 보자기에 놓은 상징을 바라봄으로써 나귀는 차별 없는 교회의 표지가 되었다. 이는 소의 구유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 타고 간 동물 품종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나귀와 쇼르가 이처럼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짝을 이루는 것은 황소의 경우 그야말로 힘과 번식력의 상징이었던 것에 비해 쇼르는 인내, 강함 그리고 수소 자신이 진 멍에를 상징한다는 사실에 있다. 나귀는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나르기 위해 개량된 품종이었다면, 쇼르는 암소(Cow)나 황소(Bull)와는 달리 거세된 수소(Ox)라는 점에서 바로 이 짐 실어나르기 위한 나귀와 통하는 것이다.
이런 쇼르로서 수소(Ox)의 기의는 현대적인 의미로 가공되었거나 각색된 것이 아니다.
이미 고대에서부터 태양에 속한 황소와는 달리 달(Moon)에 속한 의미로서의 기호에 가용되기도 했다. 생산 능력을 갖춘 황소와는 달리 거세된 수소는 생산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달의 기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에 관한 이같은 상징의 약사를 통해 보건대, 유서 깊은 전통의 기호에서 우상숭배(미신)의 기호로 전락하는 준거는 사람을 ‘소띠’로 규정하거나 특정 연도를 ‘소의 해’로 규정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사람 또는 그 시대가 스스로를 의식할 때 멍에를 짊어진 것인지 아예 거세를 당한 것인지 혼동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것이다. 멍에의 윤리학이 변질될 때 해 또는 달(月)을 숭배하는 일에 종속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어두움과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 하였다(고후 6:14).
2021년 신축년의 ‘소’를 달을 위해 거세된 소로 전락시키느냐 아니면 멍에를 감당하는 진정한 쇼르 ‘수소’가 되도록 하느냐는 우리 모두의 믿음과 그에 걸맞은 희망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
에필로그.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 그가 아내에게 보내고자 작성한 편지 삽화를 장식하고 있다. 일본인 아내 이남덕 여사와 아들 둘을 태운 달구지를 소가 이끄는 장면이다. 이중섭은 친일파라는 낙인과 위협 속에서 가족과 생이별한 채 제주도에서 홀로 살았다. 가족과 만나고 싶은 그의 희망을 ‘소’가 이끌고 있는 것이다. ‘소’를 주제로 한 여러 작품을 남긴 이중섭에게 ‘소’는 한국인의 성실성이다. 특히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작품인 ‘흰 소’의 경우 소가 하얀 이유는 백의민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는 보통 살과 근육으로 힘을 나타내기 마련인데 그의 작품 속의 소는 마르고 앙상한 뼈를 통해 우렁찬 힘을 드러낸다. 전쟁 직후의 우리나라를 표지한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 ‘소’의 궁극적 기호가 잘 표현된 작품들을 남겼다. 이중섭은 전쟁 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몇 안 되는 화가였다. 쇼르의 이 우직한 기상으로 국가의 정신을 다시 탈환하는 2021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