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기독교의 투쟁적인 면모를 감안하면 사랑이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주제를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지만,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이 결코 기독교 사랑은─ 그것이 아가페이든 필레오이든 ─아니라는 점에서 요한복음의 필레오 관한 몇 가지 특수한 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단 한 줄 요약 해놓고 시작하면, 이 요한복음의 필레오 용법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기에 몹시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의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 그리고 에로스 사랑
성경에서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주로 아가페와 필레오이다. 동사 기준으로 구약에서 아가파오(αγαπάω)는 총 270회 정도 나온다. 70인역을 말하는 것이다. 필레오(φιλέω)는 32회 정도밖에 안 나온다. 에로스(ἔρως)는 잠언에서 2회가 전부이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은 에로스를 낮은 등급의 사랑으로 여기거나 혐오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아가페가 오늘날은 신적인 사랑으로 전용되지만, 사실 이 시기의 아가페는 에로스처럼 사용된 사랑이었다. 아가페가 현대적인 의미의 신적인 사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당시 번역자들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에로스는 아마도 신화적인 방탕함에 점용되었기에 번역자들이 꺼린 의도적 조처였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에로스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에서의 아가페와 필레오
신약성서에서의 ‘사랑’은 구약성서에서 정제된 아가페와 필레오의 창의적인 석의라고도 할 수 있다. (필레오는 동사이고 아가페는 명사이기 때문에 학문성이 있는 독자이신 경우는 ‘아가파오’라는 동사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신약성서에서 아가페는 약 143회 나온다. 그중 요한복음에만 37회 분포되어 있다. 필레오는 신약성서 전체 25회 중 요한복음에서만 13회 나온다. 요한복음에 아가파오가 이처럼 많이 언급되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사랑의 복음서로 명명하지만, 비율로 보면 신약성서 전체 빈도수 대비 요한복음의 아가파오는 26%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필레오는 신약성서 전체 대비 50% 넘게 요한복음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랑의 복음’을 주도하는 것은 필레오라고도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의 아가페와 필레오
요한복음에서의 대표적인 필레오 용법은 21장일 것이다. 우리를 항상 궁금하게 만드는 예수님과 베드로 간에 오가는 이 세 번의 질/답을 복기하면 이렇다.
1.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ἀγάπη)하느냐?
베드로: 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2. 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ἀγάπη)하느냐?
베드로: 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3. 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φιλέω)하느냐?
베드로: 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선 이 두 종류 사랑에는 별다른 의도된 차이가 없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이 복음서의 용례가 전혀 일관성 있는 차이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직조공과도 같은 현대 신학자 특히 성서신학자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상대방이 ‘아가페 하느냐?’ ‘아가페 하느냐?’ 계속 묻고, 시종일관 ‘필레오 한다.’ ‘필레오 한다.’고 답한 것이 아무런 의도가 없는 거냐? 분명한 의도가 서려 있다.
아가페와 필레오의 차이에 관한 규칙이 무엇인지 상기의 다이얼로그에서는 명료하지 않지만, 베드로가 시종일관 필레오를 유지한 것은 모종의 일관된 의지의 표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세 쌍의 “아가페(ἀγάπη) 필레오(φιλέω)” 세트는 반드시 베드로의 죽음과 연관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단지 자살에 가까운 영웅적인 순교가 아니라는 사실은 선행된 다음 개요와 이어진다.
요한복음 12장 25절의 필레오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저 베드로의 문답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대한 응답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저자 요한만의 이 표현은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경구와도 같이 퍼져 있던 어록에 대한 일종의 석의라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마 10:39; 16:25; 눅 9:24; 17:33
흔히 난중일기의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必死則生, 必生則死’처럼 의미화 되기 마련이지만(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화살/총탄이 피해간다는 식의), 그와 같은 맹목적인 경구화를 요한복음은 보다 본질적인 개념으로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고 하면 대부분 사즉생(死卽生)하기로 각오한 ‘누구든지’로 보편화 해 희석되기 마련이지만, 요한복음 12:25절은 보다 구체적인 두 사람을 여기서 지목한다. 그들은 바로 호 필론(ὁ φιλῶν)과 호 미손(ὁ μισῶν)이다.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자기 생명을’이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 바람에 서술적 표현으로 변해버렸지만, 분명하게 명사처럼 분사를 쓰고 있다. 호 필론과 호 미손!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는 강력한 대비를 일으킨다. 무엇에 관한 대비?
사랑하는 자 ‘호 필론’은 생명을 잃는 자이다. 미워하는 자 ‘호 미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이다.
사랑이 그만 영생을 잃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영생을 잃게 만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이다. 한마디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말로이다.
그럼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냐? 그 답은 에필로그 베드로와의 대화가 종결 짓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φιλέω)하느냐?
시몬 베드로는 “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답함으로써 자신의 세 번 배신을 극복하고 마침내 호 미손(ὁ μισῶν, ‘미워하는 자’)이 되었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정한 호 필론(ὁ φιλῶν)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호 필론, 즉 ‘사랑하시는 자’(ὃν φιλεῖς)로 부른 특별한 사람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나사로. 죽었다 부활한 자이다.
결론적으로 이들 (주님이) 사랑하는 자/호 필론에 대해 명시하는 이 12장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표적인 ‘나사로의 부활’을 다루는 종장이다(첫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대가 레이몬드 브라운(R. E. Brown)은 이 12장을 요한복음의 제 1부 표적의 책이 끝나는 마지막 장으로 보았다. 부활을 마지막으로 표적이 종결된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친구’의 의미요, ‘필레오 사랑’의 용법이요, 부활을 일으키는 새 계명(렘 31:31-34)의 구조이다.
누가 구원이 쉽다고 말하였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구원은 멀기만 하도다.
반대로 자기 혐오에 능한 자에게도 이 구원은 멀기만 하도다. 주를 사랑해야 한다(φιλέω)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서일과 | 사순절 제5주차, 렘 31:31-34; 시 51:1-12 or 119:9-16; 히 5:5-10; 요 12: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