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복음과 상황’의 대표 양희송 씨가 집필한 책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비판적으로 다룬 서평이다. 교회에 대한 불신 풍조가 미덕이 되다시피 퇴행한 우리나라 기독교 ‘상황’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무비평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큰 책이기 때문이다.
책은 책대로, 교회 불신 집단은 집단대로, 그리고 이 책이 피격(被擊) 대상으로 삼은 전통교회는 전통교회대로 피차 사회 공멸에 기여할 뿐이라는 판단하에 이 책을 적극 비판하였다. 특히 본문비평을 투여 하였다.
이 책은 근래 목회자들이 교회론과 목회론을 동일시하는 문제라든지, 목회자들 자신의 자기 계발 유형과 교회성장론을 접목시켜 본질로부터 일탈하는 문제 따위를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소위 ‘가나안’ 성도 신학 즉, 교회에 ‘안 나가’는 현대 교회의 병리 현상을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승격시킨 다음, 신학의 정당성으로 치환해 꺼내오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오인들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1) 현상학 오인
이 책은 우선 ‘현상학’이라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쓴 책 같다. 그것은 현상학(1부)과 사회학(2부) 간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이라 함은 사회의 어떤 구조나 변화를 포착하는 학문이고, 현상학은 그 성원들의 인식론적 체험을 포착하는 분야인데도, 단지 교회에서 뛰쳐나온 불과 몇 사람의 신앙 사례에 현상학이라는 학제적 명칭을 쓰고 있으니 현실을 과장하는 오인을 야기시킨다.
가령 이 책의 초입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교회 밖에서 주일을 보내는 어떤 사람이 ‘헌금’을 사회단체 ‘기부’로 대체하는 사례를 소개한다(1장).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개인이 자신의 물질을 직접 집행하는 방식으로 실행하는 사회 분배가, 과연 교회가 맡아서 분배하던 종래의 방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하는 문제 따위를 가늠하는 것은 ‘사회학적’ 관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단적 행위가 그 당사자 자아의(혹은 타자의) 인식에는 어떠한 영항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그 인식론적 체험 부분을 정리하고 분류해주는 것이 바로 ‘현상학’ 범주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현상학 개념이 없다. 따라서 제 1부 ‘현상학’은 제 2부 ‘사회학’으로 편입시킨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상학’이라는 명칭이 아닌 그냥 ‘현상’이라고만 했어야 한다.
제 1부에서 독자가 어떤 현상학을 읽었다기보다는 단지 시험에 든 몇몇 기독교인의 신앙 스크랩 정도를 읽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아마도 그런 범주에 관한 저자의 근본적 오인에 기인할 것이다.
(2) 사회학 오인
이상과 같은 ‘현상’과 ‘현상학’에 대한 혼동은 제 2부 ‘사회학’에까지 이어져, (교회에서) ‘숨막힘’, ‘위선’, ‘분쟁’, 따위의 현상을 어떤 구조나 원리로 오인하는 인상까지 보인다. (교회론적 구조에서 설명했어야지)
차라리 앞 장에서 신 가나안 족(族)의 옹호적 정체성으로 언급했던,
① (그들은) 열광주의자들이 아니다,
② 단순 교회 쇼핑족도 아니다,
③ 영적 엘리트주의도 아니다,
④ 영적 소비자 아니다,
ㅡ따위의 특성을 (가나안 성도군이 지닌) 사회학적 구조로써 도출하는 정도는 되었어야, 비로소 사회학이라는 학제적 규모의 적용이 가능했을 텐데, 저자는 저 요목들을 마치 “가나안 성도는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교시로 천명하는데 쓰고 말았다. 통계나 보고가 아닌 저자 자신의 설명이 되고 만 것이다. 자기 설명이 무슨 사회학인가?
‘가나안 사회학’이라는 이 두 번째 챕터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험 들어 교회 떠난 사람들의 푸념 정도로 밖에 안 들리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학 개념에 대한 저자의 오인을 반영한다.
이 책은 이렇게 해서 책의 3분의 2를 소진한다.
(3) 신학 오인
1) 교회사 오인
이 챕터는 아나밥티스트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역사적 아나밥티스트들이 당대에 세상에 출몰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자칭 ‘가나안 족’ 자신이 (자신들 이외에는) “1400년 동안의 그 모든 신앙이 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실제로 이 책은 그런 인상을 주고 있다.
그토록 혐오하는 가톨릭을 교회사에서 도려내겠다면 과연 어느 시점부터 어느 시점까지를 도려낼 수 있을까? 제2성전 시대에는 결혼 가정을 가르고 혼혈 아이와 애 엄마까지 내쫓았던 사례가 있었는데 그렇게 도려내야 할까? 그런 식으로 교회사를 도려낸다면 이 책이 지적한 바, 다문화 가정과 같은 마이너리티를 무시하는 처사로의 회귀는 아닐까.
2) 구원론 오인
이 책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신학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명제의 파괴이다. 교회사를 동원하고 사회적 변화를 추인해 명제의 갱신을 꾀하지만, 이 명제를 ‘교회=구원’이라는 등식으로 오인한 데서 온 혼동으로 보인다.
‘교회=구원’ 명제는 인류가 구원을 받을 때 “교.회.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본 말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명제를 창제한 키프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아무려면 ‘사랑의 교회’ 같은 건물이 있었겠는가?
이 책이 이와 같이 교회는 건물이 아님을 강조하면 할수록 ‘교회는 건물’이라는 상대적 강박을 엿보인다(p. 112). 결국 그러한 강박이 건물 벽을 부수거나 뛰쳐나와야 한다는 교회론을 장착시켰을 것이다.
3) 교회론 오인
a. 에클레시아 오인
이 책도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처럼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ιαστής)라는 단어의 어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데, 당대에 ‘모임’을 뜻하는 수나고게(회당)보다 왜 에클레시아를 선호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헬레니즘계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에클레시아가 더 적합하다는 사실의 발견이 있었는데, ① 이것은 희랍어로 말하는 유대인 사이에서 이 단어가 폐기되었고 동시에 그들은 수나고게에 진정한 지역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② 특히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설립자들은 히브리어 카할과(에다가 아닌) 에클레시아 간의 매칭을 선호했는데 카할과 에클레시아는 모두 k와 l음가를 가지고 있으며 둘 다 ‘부르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③ 에클레시아는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시민들의 회집을 나타내기 위해 세속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기들의 성원으로 이방인을 신속히 받아들였던 사회를 지칭하는 데 그렇게 부적합할 정도로 유대적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끝으로 ④ 대개 수나고게라고 불리는 소도시 혹은 지방의 건물을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것이 점점 환영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리적 집합을 표지하던 어휘 ‘에클레시아’에 심미적 재구성을 가하여 기존 전통교회를 해체하는데 활용했다가, 그것을 다시 가나안 교회 네트워크 집합으로 활용하는 것은(p. 164) 부당한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특히 윤리적으로 대단히 부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b. 성례전 부재
교회론을 단지 ‘들어오고’ ‘나가는’ 범주 외에는 개념 짓지 못하는 것이 이 책에서 추구하는 교회론의 한계일 것이다. 이를 테면 성례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이 그것이다. 적어도 교회론이라 명명할 수 있으려면, 성례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막중한지는 너무도 개론적 사항이기에 여기에 일일이 지적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여기선 일체 도외시 되고 있다. 한마디로 개론의 부재인 것이다.
c. 더 이상 패러다임 쉬프트
교회는 사실 패러다임 쉬프트에 지쳤다. 예컨대 10여년 전 우리나라 교회를 강타했던 셀 교회 패러다임은 작은 교회처럼 다가와 큰 교회 성장 패러다임으로 소진된 바 있다. 그리고 근간에는 유기적 교회? 이 책에 정리된 이머징 쳐치는 유기적 교회 앞의 순번인가? 뒤인가?
게다가 패러다임 쉬프트는 있는데 교회적 대안은 부재하다.
d. 대안의 부재
책의 중반부에 다다라서 저자가 “원천적으로 ‘가나안 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이다”라는 사실을 밝힐 때(p. 95) 처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 스스로 자신을 위한 대안을 찾아라”는 대목에 이르러(p. 96) 두 번째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완벽한 대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p. 100)는 말을 지나,
“가나안 성도가 탐방을 하다가 자신이 떠나온 교회보다 더 권위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교회로 정착하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p. 101)는 대목에서는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만 있지 교회적 대안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도달하였다.
교회로서 대안이 없다면 (가나안) 성도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였을 뿐이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4) ‘가나안 성도’에 대한 오인
이 책은 ‘가나안 성도’를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말로서 ‘안 나가’를 뒤집어 나온 신조어로서 오늘날 제도 밖에서 신앙을 찾고 있는 일군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라고 소개한다.
그들이 100만명 정도일 것이라는 약간은 황당무계한 통계 방법으로부터(p. 36) 여러 논증들을 일일이 논박하려다가 본 서평 역시 지면 관계상 이른바 이 신조어에 대한 다음 견해를 남기고 마칠까 한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안 나가’(not going in)라는 뜻도 되지만, 교회 밖으로 ‘안 나가’(not going out)라는 뜻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앞서 일렀거니와 교회를 하나의 건물 벽으로 규정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탈출도 못하는 바보로 여기는 이 같은 편견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라고 그토록 스스로 외치면서도 결국엔 건물 벽으로 교회를 국한해버리고 마는 상대적 파라독스에 갇히고 만다.
교회 안에도 ‘가나안 성도’(not going out)는 있다. 그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가나안 성도와는 달리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 요나 4:10-11
에필로그.
이 책이 ‘가나안 성도’의 기원으로 삼기 위해 함석헌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함석헌의 텍스트는 도리어 그들의 ‘가나안’(not going in) 행태를 질타하는 데 종사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장이 안고 있는 역설이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러지면 ‘안나가’가 되지 않나? 오늘 한국 교회의 특징을 말한다면 ‘안 나가’는 부대다. 그들은 사회악과 겨루는 역사의 싸움에서 뒤를 빼고 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둘러앉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예배라고 한다.” ㅡ 함석헌 (p.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