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이 영화에 은폐된 고도의 이해를 꺼내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포함된 스포일러가 있다. 1~5까지는 플롯을 전치하고, 6 이하부터 해석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람 전에 읽어야 하느냐 후에 읽어야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뒤따르지만 스포일러가 불편한 독자는 다음 견해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사람들이 미리 좀 읽어두었더라면, 영화 <장미의 이름>(1986)은 흥행에 좀 더 성공했을 것이다. 패트릭 쥐스킨트의 <향수> 역시 문자로는 읽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 <향수>(2006)를 포르노인 줄 알고 보았으며, 기억의 잔상에도 여전히 포르노로만 남아 있다. 반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우리에게 스포일러가 지나치게 유포되었지만 영화 <레 미제라블>(2012)에서 어떠한 반감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인터스텔라>(2014) 정도의 영화라면, 이 영화를 독서할 수 있도록 이해를 끌어올려주는 정제된 해석을 영화보다 먼저 접하더라도 원작의 의미는 훼손 없이 여전히 은폐된 상태로 보전할 수 있다. 판단은 각자에게ㅡ.

인터스텔라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들이 <인터스텔라>를 SF장르에만 가둬놓고 자연과학 평론만 일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영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욱 향상된 완성도를 갖춘 <인셉션> 정도로 보면 무리 없을 것이다. <인셉션>이 심리학 옷을 입고 ‘꿈과 현실’이라는 공간을 오갔다면, <인터스텔라>는 천체 물리학이라는 옷을 입고서 ‘우주와 현실계’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나쁜 일, 좋은 일, 꼭 일어나야 할 일

이 영화의 배경은 식량난과 대기 오염으로 죽어가는 지구이다. 대학은 극소수만 보내는 시대. 왜? 한 사람이라도 더 농사짓게 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게다가 미합중국은 어느 정도 해체를 당한 듯 보인다. MRI가 단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과학 혐오의 시대로 퇴행한 미국은 현대국가로서 자신의 이상을 상징하던 ‘아폴로11호 달 착륙’도 사기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교과서에 정식 등재한 시대를 도래시키고 말았다.

이런 시대의 농부로 살아가는 NASA 파일럿 출신 쿠퍼가 아내도 없이 기른 자녀 톰과 머피를 학교에 데려다주던 어느 날 타이어에 펑크가 난다. 오빠 톰이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을 내뱉자, 여동생은 대들며 싸운다. 자기 이름이 머피였기 때문이다. 이름 때문에 언제나 놀림 받는 머피는 왜 자기에게 그런 이름을 붙였느냐며 아빠에게 따진다. 그러나 쿠퍼는 ‘머피의 법칙’이란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꼭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우리는 ‘나쁜 일 아니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꼭 일어나야 했던 일’이라고 여기는가?

이것이 이 영화의 씨줄과도 같은 것이다.

유령이냐 에너지냐

딸아이의 방에서 가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책장에 꽂힌 책이 불규칙하게 마구 떨어지거나 황사 바람이 지나간 후 바닥에 깔린 먼지에는 마치 바코드 같은 결이 나 있다. 딸은 유령이라 하고, 아빠는 중력의 작용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코드가 새겨졌다. 어느 지역을 특정하는 좌표였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남긴 존재가 유령인지 아니면 어떤 에너지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긴 채 그 좌표를 따라간다.

플랜 A or 플랜 B

사라진 줄만 알았던 NASA는 축소된 기구로 존재하고 있다. 죽어가는 지구를 위해 연구하면서.
이들에게는 죽어가는 인류를 구할 방도가 두 가지 있다.

플랜 A: 거대한 우주선을 띄우는 일. 생존자를 모아 지구를 탈출하는 방안이다.
플랜 B: 1천개의 인공수정란를 외계로 보내 인종을 새롭게 퍼뜨리는 계획이다. 무게 중심은 플랜 B에 쏠려 있다. 이미 12명의 특임 과학자들이 파송된 상태이며 주인공 쿠퍼에게는 수정란을 싣고 이들이 찾아냈을 행성을 다녀오는 임무가 주어진다.

S.T.A.Y

주인공 쿠퍼는 이 제안에 응하기 싫었지만 딸이 살아갈 세대를 생각하며 희생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런 정황을 알지 못하는 딸 머피는 아빠를 만류한다. 특히 책장에서 쏟아진 책 배열의 코드가 S.T.A.Y (떠나지마!)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가지 말것을 거듭 만류하지만 어린 아이의 투정일 뿐이다. 

아빠는 자신이 차고 있는 것과 똑같은 파일롯 시계를 머피에게 주며, 꼭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뒤 떠난다. 그러나 머피는 아빠가 준 시계도 집어 던지며 작별인사도 거부한 채 떠나는 아버지를 마음 아프게 만든다.

첫 번째 행성 밀러 ─ 시간과 중력

산드라 블록의 <그래비티>가 순수한 중력에 관한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시간과 중력’에 관한 영화이다. 중력이 무지막지한 블랙홀 곁은 지나가기만 해도 시간이 왜곡된다는 이야기 설정 아래, 쿠퍼 일행은 우선 가장 가까운 밀러 행성에 착륙을 시도한다. 그나마 그 별의 1시간은 지구의 7년이기에 가능한 한 빨리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야 한다.

물이 많았던 그 별은 착륙하고 보니 어마어마한 파도가 폭주하는 곳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밀러 행성에서 송출했던 강력한 신호는 밀러가 행성에 착륙하자마자 보냈던 신호로서 중력을 통한 시간 왜곡으로 지구 시간 10년이 넘도록 전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밀러는 10년 전, 아니 ‘조금 전에’ 파도에 죽고 없다.

우리가 보통 밤에 목격하는 반짝이는 저 별은 지금은 이미 폭발해 없어진 별일 수 있다. 빛의 흔적이 여태 더디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일 수 있지 않겠는가. 응답이 종료되었는데 여전히 신호를ㅡ.

가까스로 이 행성을 탈출하여 모선 인듀어런스로 복귀했지만 몇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무려 23년이나 지나 있었다. 지구로 보내는 통신 기능이 망가져 모선에 대기하다 노인이 되어 버린 로밀리가 이들을 맞는다. 이 같은 치명적 시간의 함몰은 마치 <인셉션>에서의 림보(Limbo)를 연상 시킨다. 림보는 성서에서 연옥이다.

모선 인듀어런스 호에는 23년간 지구에서 온 메시지가 보관되어 있었다. 쿠퍼는 아들과 딸의 영상 메시지와 마주한다.

중력 때문에 시간이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시간 개념은 이 영화의 주된 날줄이다.

시간의 왜곡은 대화의 한계로

떠날 때 소년이었던 아들 톰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영상에 나타난다. 아들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복받쳐 오른다. [잠시 끊기고 새 메시지…] 아들이 어떤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잠시 끊기고 새 메시지…] 아들이 로이스란 여성과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쿠퍼의 얼굴은 웃음과 울음이 겹쳐있다. [잠시 끊기고 새 메시지..] 아들 부부에게 제시라는 아기가 태어나 쿠퍼가 (젊었음에도) 할아버지가 되었음을 보고한다.

그렇지만 쿠퍼는 이 오랜 메시지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들을 수만 있다. 게다가 지금쯤 딸 머피가 나올 때도 되었건만 이 아이는 한 번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

[잠시 끊기고 새 메시지..]
아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잠시 끊기고 새 메시지..] 나빠진 환경으로 인해 결국 아기 제시는 죽어서 쿠퍼의 아내와 장인의 곁에 묻었다는 보고를 끝으로 더 이상 아들은 메시지가 없다.

아버지가 죽은 걸로 간주한 것같다. 눈물이 범벅이 된 쿠퍼가 초조해 하고 있을 때 영상이 끊겼나 싶더니 성인이 된 머피가 드디어 등장한다. 딸의 첫 마디는,

“Daddy, Son of a bitch!”

딸의 나이가 아빠와 같은 중년이 될 정도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것이다.

무지막지한 중력은 공간의 왜곡뿐 아니라 시간의 왜곡,
그리고 대화의 왜곡을 가져온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떠올려 보았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진정한 대화의 형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과 더러 ‘주거니 받거니’ 대화 하였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는 이단임이 자명해진다.]

머피의 법칙

밀러 행성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기 때문에 지구로까지 귀환하려면 앞으로 한 개의 행성밖에는 방문할 수 없다. 쿠퍼 일행은 에드먼즈보다 주기적 신호가 확실한 만(Mann) 행성으로 결정한다.

그 시각 지구에서는 이 모든 플랜의 기획자인 존 브랜드 박사의 임종을 앞두고 있다. 쿠퍼의 딸 머피는 브랜드 박사의 수제자가 된 상태다. 임종을 위로하러 온 머피에게 브랜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속였다고 고백한다.

지구 생존자를 우주로 이주시킨다는 플랜 A는 원래부터 (아예 실현할 생각이 없는) 불가능한 계획이었으며 제2의 지구를 찾아 떠난 아버지 일행은 처음부터 돌아올 수 없는 출발을 한 것이라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에 격분한 머피는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는지 알기 위해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떠났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브랜드는 대답 없이 임종한다.

이러한 분노를 영상에 담은 머피는 아버지와 브랜드 박사의 딸 아멜리아에게 전송한다.
머피는 분노로 가득 찬 메시지를 쏟아내지만 아버지가 ‘알고 떠났는지 모르고 떠났는지,’ 여전히 그녀는 알지 못하는 대화의 한계에 갇혀 있다.

‘있지도 않은 플랜 A’

이것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인가, 꼭 일어나야 할 일인가?

두 번째 행성 만(Mann) – 존재와 시간

시간에 관한 저서를 남긴 학자 몇 명이 있는데 인간의 존재와 연결 지어 가장 강력한 이론을 정제한 사람은 아마도 마틴 하이데거일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기를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은 바로 ‘처해있음’이라고 정리하였다(존재와 시간).

‘처해있음’이란 무엇인가?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손쉽게 ‘처해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아마 대학 졸업하고 나서 일 것 같다. (취직 안 되니까) 그러나 그것은 비단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뿐 아니라,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모든 미지의 환경, 심지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처해있음’ 즉 ‘내던져진 존재’로 자기를 인식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하였다.
그 다음 존재로서의 인식은 죽음이다.

즉 인간은 죽음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을 통해 시간을 인식하며, 그러한 ‘선 구조’가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존재로 인식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밀러 행성 다음으로 도착한 이 만 행성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로서’ 인간을 발견한다.

만 행성에 도착한 일행은 동면 상태에 들어있던 만 박사를 깨우는데, 만 박사가 깨어나자마자 한 행동은 바로 울음이다. 쿠퍼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맞대고는 한참을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울음이 그치자 만 박사는 말한다. 인간이 홀로 있을 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바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Face to Face.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그는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만 같다. 그렇지 않아도 이 플랜의 공식 명칭은 ‘나사로의 부활’이다. 지구를 출발하기 전 브랜드 박사도 말했지만, 지금 여기서 깨어난 만 박사 스스로도 자신을 부활한 나사로라 칭하고 있다.

만 박사는 곧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가장 처음 본 얼굴이었던 쿠퍼를 배신한다. 지구로 복귀하려는 쿠퍼를 못가게 하고 죽이려는 것이다. 자신이 동면 하기 전에 저지른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산소 헬맷도 깨뜨려 놓은 채 쿠퍼를 얼음산에 쳐넣고 나온다.

그러면서 만 박사는 말한다. “떠나올 때 나는 분명 죽음을 각오 하고 떠났는데.., 죽음에 직면하게 되니까 왠지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노라”고.

인간은 이와 같이 시간(‘처해있음’)을 통해 존재임을 인식하고,
또한 시간(‘죽음/사건’)을 통해 존재인 자신을 (미래로) ‘내 던진다.’

아담이 첫 대면 했던(Face to Face)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배신했을까?

차원, 차이, 사이, 세계 – 사건의 지평선/지평융합

딸 머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전말을 알게 된 쿠퍼는 곧바로 머피가 있는 지구로 복귀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 박사로 인해 모선이 일부 파괴되었고 현실적으로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방법은 하나, 블랙홀 진입 뿐이다.

블랙홀 주변을 통과 하면서 지구시간 56년이 경과되는데, 쿠퍼는 블랙홀로 자신과 같이 진입하는 줄로만 알고 있는 아멜리아의 안위를 위해 속이고 그녀를 세 번째 행성 에드먼즈로 보내고서는 자기 홀로 블랙홀로 진입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섰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말은 벗어나 되돌아 올 수 없는 블랙홀과의 경계로서 블랙홀에서만 볼 수 있는 경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평 너머 형성된 공간에 들어오자 쿠퍼는 이제 저쪽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저 너머에 있는 머피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쪽 세계와 저쪽에 있는 머피의 세계의 경계를 ‘책(장)’으로 표현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밝힌 하이데거의 제자 가다머는 말하기를 ‘세계’(the world)라고 하는 것은 ‘사이’(between)라고 하였다.

책장 밖에 있는 머피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유령내지는 어떤 알 수 없는 코드로 인식만 하였지 그것이 어떤 언어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어떤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저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알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에 이르러서는 달라졌다. 설령 저자가 미처 그 작품에 대한 설명을 못했더라도, 아니 원저자가 어떠한 의도로 그 작품을 구성했더라도,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사이’를 통해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에 다다른 것이다.

머피와 아버지는 마주한 헤어짐의 자리에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편방향의 언어인 영상 메시지에서도 둘은 서로 마주할 수 없었다.

비로소 완전히 격리된 ‘사이’(between)을 접했을 때 둘은 서로 해석의 이해에 다다른 것이다.

스티븐 호킹은 이를 두고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불렀지만,
가다머의 술어로는 ‘지평의 융합’이라는 말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다.

between, 사이,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장벽인가 통로인가?

성서는  between을 ‘약속’이라고 부른다.
“계약”의 히브리어 베리트가 바로 이 between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은 분명 장벽과 공간을 형성하지만,
차이, 곧 그 사이(between)를 통해서 나온 것이 계약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사이를 연결해 준 것은 바로 중력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중력이기 때문이다.

중력이 무엇이었던가?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
우리의 노동을 무겁게 하는 것.
노동 그 자신이 중력 아니던가?

[저편 세계에 있는 딸에게도 바로 이 신실한 중력으로만 신호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동이 바로 실천(praxis)이라는 점에서
영화 「그래비티」에서의 중력은 단지 {무음}이었지만 (또는 무음의 공포)
여기 「인터스텔라」에서의 중력은 바로 <약속>인 셈이다.

딸 머피에게 S.T.A.Y.라는 부호를 찍어낸 존재는 유령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고 바로 저 ‘시간/사건의 지평’을 돌아나온 아버지였던 것이다.

에필로그

임종을 앞둔 딸 머피는 자기보다 젊은 아버지(128살) 쿠퍼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I knew I’d see you again”
(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묻는다.
“How?”

“cause my daddy promised me”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죠.)

이 글은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안에 실려 있으며 책 전체를 통해서 읽으면 더 유익하다.
교보문고: http://goo.gl/yIN4Zi
알라딘: http://goo.gl/nhHZSX

이 사이트의 다른 영화 읽기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인터스텔라(2014)를 기독교인이 감상하는 법”에 대한 10개의 생각

  1. 좋은글 잘 봤습니다 영화의 본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데 앞부분에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있다고 써주시면 좋을것 같네요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 알면 재미가 반감될 중요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2. 교수님/목사님의 난해한 글을 나름대로 쉽게 이해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세계가 있더라도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은 …. 다른 세계 언어를 보고 들을 수 없고 설령 신호를 받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understanding meaning 이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통로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블랙홀이라는 엄청난 중력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뛰어 넘거나 사건/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죽으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죽음이 일반 죽음과 어떻게 다르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 그 죽음을 통해서 다시 현 세계로 돌아오는 것은 나사로의 부활과도 같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블랙홀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한 부분이 되는 것일까요?

  3. 1. 글이나 문학(영화를 포함)은 우리의 세계관으로 항해하는 우주 정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세계관 만큼은 오로지 성서를 통해서만 확정 짓는 것이 건강합니다.
    2. 블랙홀을 그리스도의 능력이나 죽음과 알레고리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개념만 항해했을 뿐입니다. 그것들이 표지하는 개념은 '차이'입니다.
    3. '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실시간으로 말은 해 올리지만, 우리는 책(성경)을 통해서만 듣는 단절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차이 덕에 우린 계약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며 성령까지 선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ㅡ.
    4. 유념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로 성서를 읽는 게 아니라, 성서로 영화를 읽는 것입니다.

  4. 우와…. 감사합니다…. 정말 어렵네요….. 소화시키는데 꽤 시간이 걸릴듯 싶네요….

    한가지…. 구약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선지자들이 계시었고….. 또 신약에도 천사들과 대화한 분들이 계시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현대에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세계 어느 구석에서 이런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대화를 이단이라고 하시어서 한 마디 적어보았습니다….

  5. 1. 구약 사람들이 현대인의 스마트(폰) 환경을 이해할 수 없듯이 구약 사람들의 환경을 현대식 스마트 환경으로 오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2. 개별적 대화들은 언제나 제사를 통해 일반화 되어 갔습니다. 가령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대화했지만,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한 사람은 모세뿐이라는 (모순된) 문서 저자의 증언도 있는 것입니다.
    3. 결국 모세는 그 개별적이던 이전의 여러 대화를 묶어 문서화 하고 제사를 확립한 인물입니다. 그것을 토라(우리에게는 구약) 라고 부르며, 그 토라와 제사(예배)를 멀리하고 개별적이고도 주관적인 대화로 돌아가려는 것을 퇴행이라 부릅니다.
    4. 예수께서는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참 어렵게 기도를 했습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5. 예컨대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해하는 사람은 칠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 모양인데, 이런 걸 바로 의역의 이단(heresy of paraphrase)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6. 감사합니다…. 꾸벅

    블랙홀은 재미삼아 적어 보았던 것인데….. 다음 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그 차이 덕에 우린 계약 위에 설 수 있는 것" 에 조금더 부연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대화들이 일반화 되어 갔다는 것에 동의 하지만 예외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에녹과 엘리아가 죽음을 겪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요?
    ________________________

    Sign Out 버튼을 자꾸 선택해서 댓글을 날려 버리게 되네요….. Publish 버튼과 위치를 바꾸거나 다른 곳에 놓으심이 어떠하신지요?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