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예수 재림시에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성경 예언이 1992.10.28에 일어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당일 예언은 빗나갔고 리더였던 목사는(이장림) 구속되었다. 구속 된 사유는 예언이 빗나가서가 아니라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였는데 그의 자택에서는 1993.5.22 만기 도래되는 환매채와 수표 1억9300만원, 그리고 미화 2만6700불이 발견되기도 했다. 반면, 신도중에는 퇴직금을 모두 바친 철도공무원, 아들과 가출해 선교회에 합류한 주부, 여기에 합류를 막는다고 음독자살한 여고생, 그리고 심지어 ‘들림’을 가볍게 하기 위해 낙태를 한 임산부도 있었다고 전한다.
본론 | 바른 종말론
공의의 파괴
우선 종말의 주제는「휴거, 바코드, 베리칩」이 아니라「공의」이다. 왜 종말이 오는 지, 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종말은 실제로 유대교 형성의 배경 그 자체였다. 유대교는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처음’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맞지만 그 창조주를 언제 기억해냈는지가 중요한데 그 때가 바로 ‘종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죄도 한 개체로서가 아닌 하나님 공의에 관한 포괄적 침범을 다룬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모든 죄상들 역시 공의의 붕괴를 기록한 것이고, 또 그것은 오늘날의 종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공의의 심판
그리고 심판은 회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다미선교회>의 실패는 휴거를 마치 심판 회피의 거점으로 축소한 데 있다. 심판의 장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십자가 도상이다. ‘들림’도 그곳에서 발생한다. 계시록을 이 전제와 분리시켜 읽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심판대, 또 다른 예수를 소개 받게 되는데 십자가 도상과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더 강도 높은 종말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이단 되기 십상이다.
공의의 회복
성서가 남긴 묵시와 작금의 묵시현상 간 가장 큰 차이점은 ‘회복’을 말하는 가에 있다. 노아의 방주가 회복을 의미했으며, 광야 성소도 회복이었으며, 다윗 성전도, 그리고 예수의 살과 피 역시 회복을 기표로 갖는 종말이었다. 구속사적 종말은 언제나 공의의 회복을 목적하고 재연되어왔다. 파괴와 불안이 아니다.
에필로그 | 반복의 도그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들 가운데 근본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 마디로, 성례전의 ‘반복’에 실패한 자들로 규정할 수 있다. 초림 이후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종말과 심판은 바로 이 성례전에서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종말에 가서도 보전해야 할 최선의 도그마인 것이다.
누가복음 본문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대목은 마가와 마태복음에 공히 나오는 본문인데 유독 여기 누가복음에서 만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아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로 기록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 “모든 나무”가 추가된 것일까. 그것은 지정학적 유대교 팔레스타인 만의 독점적 사건으로서 종말이 재생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종의 반복을 고려한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이미지 참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020020921901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02&officeId;=00020&pageNo;=19&printNo;=21988&publishType;=00020
http://history.khan.kr/176
http://wnewskorea.cafe24.com/bbs/board.php?bo_table=weekly_issue≀_id=199
http://ndarticle.joins.com/pad/2012/10/25/20121025194415390.jpg
* 2012년 12월 2일자 강림절 | 바른 종말론, 무화과나무 비유의 오해 | 성서일과, 눅 21:25-36. (c.f. 렘 33:14-16; 시 25: 1-10; 살전 3: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