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강의에 미우라 아야꼬의 오랜 책을 참고문헌으로 올리면서 문득, 시오노 나나미가 떠올랐다. 똑같은 일본 여자이고 연배도 비슷한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ㅡ 하고.
위선을 뜻하는 영어 낱말 hypocrity와 이탈리아어의 ipocrisia는 둘 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중략>…그들은 위선을 사전에 나오는 의미로만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위선을 상급과 하급으로 구분했다. 겉치레로 보이는 선행이라는 설명은 그리스인에게는 하급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스인이 생각한 상급 위선은 겉꾸밈이든 겉치레든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위선을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수단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필요악은 아니다.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악’이다…<중략> 상급이든 하급이든 관계없이 위선적인 행위 자체를 못하는 성격이 티베리우스의 결점이었다. p. 170-1.
이런 레토릭을 통해 티베리우스에 대한 이해를 득한 다음에는 역사가들에 대한 공략이 시작된다.
타키투스는 그렇지 않다. 다만 그의 저술을 읽을 때는 그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역사 기술) 방법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서술에 휩쓸려갈 것이다. 볼테르를 시작으로 근대와 현대에 티베리우스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도 타키투스보다 더 신뢰할 만한 역사 서술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p.200
이렇게 우선 타키투스를 까고,
수에토니우스의 서술은 훨씬 자세하다. 그의 <황제열전>에는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가 저지른 ‘악행’이 다음과 같이 열거되어 있다.첫째,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둘째, 음탕한 성행위를 개발하여 실제로 그런 행위를 시켰다는 것 각지에서 모아들인 소년소녀들을 한 쌍씩 짝짓고 거기에 그 방면의 대가를 한 사람씩 붙여서 티베리우스가 보고 있는 앞에서 이들 세 사람에게 성행위를 시켰다고 한다….수에토니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목적은 티베리우스의 쇠퇴한 성욕을 자극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셋째, 총면적이 7천 제곱미터나 되는 부지의 숲이나 동국 곳곳에 목신이나 요정으로 분장한 소년소녀들을 숨겨놓고, 티베리우스가 그것에 가면 그 앞에서 그들이 성행위를 해 보이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다는 것.넷째, 티베리우스는 특히 어린 소년소녀를 골라 ‘작은 물고기들’이라고 부르고 그 ‘물고기’들이 널찍한 로마식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의 가랑이 사이를 헤엄치면서 혀나 이로 그의 성기를 건드리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티베리우스의 음행에 희생된 자들은 역할이 끝나면 해발 300미터 벼랑에서 떠밀려 바다로 떨어지는 운명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나폴리 사람들까지도 굳게 믿고 있는 티베리우스 전설이다.
위와 같은 수에토니우스의 진술은 ‘전설’ 내지는 빨간책(저 나라에서는 노란책) 정도로 평절하는데,
근대와 현대의 로마사 연구자들 대다수는 이런 악행을 일소에 부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현대의 ‘옐로 페이퍼’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았다.‘작은 물고기들’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고 소문이 난 사람 중에는 노년의 아우구스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성행위가 고대 로마의 남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자기가 하고 싶어도 이룰 수 없는 꿈을 남에게 의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금욕적’이었던 티베리우스의 생활방식이 오히려 대중의 환상을 자극한 건 아닐까. p. 209-11.
그녀의 이와 같은 티베리우스의 은둔 생활에 대한 변론은 ‘가출’이라는 낭만적 용어로 집약되는데,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그후 10년 동안이나 수도를 비우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은퇴라고 생각지 않고 ‘가출’로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부터 가출하겠다고 알리고 집을 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p. 171-
(2) 칼리굴라에 대한 변증
칼리굴라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 유대인이 묘사한 칼리굴라는 로마인 역사가들이 묘사한 칼리굴라보다도, 또한 후세 작가들이 묘사한 칼리굴라보다도 훨씬 실상에 가까운 묘사인 듯싶다. 2천 년이나 지난 뒤 알베르 카뮈가 희곡 <칼리굴라>에서 묘사한 칼리굴라, 또는 1980년대에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잇달아 제작된 <칼리굴라>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의 괴물로 묘사된 칼리굴라는 그의 시대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뒤에 항간에 떠도는 풍문을 주워 모아서 쓴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서 소재를 얻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괴물은 아니었다.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불행, 아니 제국의 불행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젊은이가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지위에 앉아버린 데 있다. 사물의 옳고 그름이나 선악 따위를 판단하는 안목은 그에게도 있었다. 애마인 인키타투스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할까 하고 농담을 할 만큼 원로원의 통치 능력이 쇠퇴한 것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농담이 후세에 전해지면 말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는 따위의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p. 303
(3) 네로
불이 났을 당시, 네로는 무더위를 피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해변도시 안치오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에서 불이 난 것은 그 이튿날 알았다. 그것을 알자마자 네로는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로 들어갔다.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별궁은 무사했지만, 26세의 황제는 별궁에 편안히 앉아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했다. 네로의 입에서는 차례로 명령이 떨어졌고, 그 명령은 신속하고 확실하게 집행 되었다.…네로는 이재민 수용과 함께 전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식량 공급도 잊지 않았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는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밀도 있었고, 하역한 직후여서 아직 선착장에 쌓여 있는 밀도 있었다. 네로는 그 밀을 몽땅 로마로 운반하라고 명령했다. 오스티아 가도와 테베레 강을 통해 수송된 밀은 불길이 미치지 않은 구역의 제분소로 보내졌고, 이재민들에게 밀가루나 빵으로 배급되었다. 로마 근교의 도시나 농촌은 치즈나 채소나 과일을 공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불에 타 죽거나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거나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대강의 수치도 남겨두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야외극장 붕괴 사고로 인한 사상자 수는 명확하게 기록했지만, 서기 64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죽은 사람의 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는 건물 피해는 막대했지만 인명 피해는 적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영화 <쿠오 바디스>는 반로마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가 과장되었는지도 모른다. p. 544-5.
네로 황제의 로마 재건책은 시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힘을 합쳐 로마 재건 작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로마는 전보다 더욱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햇빛이 집 구석구석까지 들어오게 되어 더위를 전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졌다는 불평이다. 하지만 네로를 혹평하는 역사가 타키투스도 네로의 이 로마 재건책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한 유효적절한 시책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p. 550
(4) 식민지 국민에 대한 제국주의적 인식
그리스어에서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오늘날에는 오로지 유대인만의 특유한 현상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그리스 민족이 선배였다… 그리스인이 선구자였고 그 다음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의 이주와 유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한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이나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1천 년에 시작된 그리스 민족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에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에 그리스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다. 유대 민족은 돈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는 이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p. 289
이와 같이 유대인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녀는 아예 로마인 내지는 서구 유럽인이 다 된 것 같은 인상을 주곤 한다.
종교의 자유도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고, 유대교 특유의 관습도 모두 인정하지만, 로마에 반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이것이 로마의 방침이라는 것을 로마 세계에 사는 유대인은 잊어서는 안되었다. p. 293
한마디로 유대인들이여 “명심하라-” 이 소리.
또한 티베리우스는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갖고 싶다는 유대인의 요망도 인정해주었다. 이것도 영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휴일은 신에게 바치는 축제일로서 평소에 하던 일을 쉬고 종교 의식에 참석하거나 신에게 바친 경기대회와 연극 따위를 구경하는 날이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유대인의 휴일이 그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토요일에도 일하는 지배자 로마인은 토요일이 올 때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관습을 인정해주었다. p. 292-3
아.무.일.도.하.지.않.는. 유대인들에게 아량을 베풀었는데, 그런데 이 색히들이… 라는 소리.
뭐 이런 것들 외에도 기독교도를 향한 유대인에게 못지 않은 제국주의적 경멸의 어조들도 많지만 이정도로 하고.
다음은 1922년생 미우라 아야꼬(1999년 사망).
그녀는 종교적 입장을 제하더라도 탈/반 제국주의라는 관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와는 사뭇 다르다.
(5) 우상 숭배 배격에 나타난 제왕에 대한 반감
‘가내 안전, 사업 번창’이라고 하면 神社(신사)에 합창할 때의 제목처럼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참으로 신에게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할까를 모르는 것이 실정이 아닐까?… <중략>… 이 기회에 말한다면 지금까지 솔로몬과 같은 지위, 또는 가까운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며 살았을까? 또는 있을까? 노부나가, 헤데요시, 이에야스, 역대의 총리, 대신들, 히틀러,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문득 그런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진정 선악을 분별한다면, 솔로몬이 원한 것처럼 공평하고 바른 재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 이야기」p 222
이렇게 드러난 제왕주의에 대한 반감은 다윗에 대해서도,
그런데 이렇게도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시를 지은(시편 51편을 말함) 다윗을 내가 좋아하게 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일일까? 그것은 역시 내가 우리야를 동정하고, 역시 우리야를 죽인 다윗을 용서할 수 없다는 점에 마음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다윗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불손한 일이다….진정 내가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은 다윗을 용서할 수 있는 때인지도 모른다. 다윗을 용서할 수 없는 동안은 이 시를 좋아한다고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p. 216
신앙 영웅이라면 무조건 맹신하고 보는 입장과는 배치하는 다윗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솔직한 본문.
그녀의 반(反) 제국주의 반 제왕주의는 성경뿐 아니라 자기 나라에 대한 입장 속에서도 면면이 묻어난다.
나는 지금 어떤 잡지에 <호소까와 부인>을 연재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호소까와 부인이란 호소까와 타다오끼의 아내인데, 아께찌 미쯔히데의 딸이다. 아버지 미쯔히데가 죽은 후 그녀는 열성있는 키리시딴(크리스천)이 되어 취후는 장렬한 죽음으로 마치는데, 그것은 고사하고 나는 미쯔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그 후의 일본은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한다.
노부나가는 아마 외국과 무역도 했었을 것이지만, 동시에 침략군대를 외국으로 파견했을 것이다. 한국,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서양으로조차 군대를 파견하려고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바다를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는 무모한 짓을 해서 일본을 타국의 속으로 만들기조차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쯔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은 그 시비는 여하간에 일본에게 있어서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참에 주문했던 카가와 토요히꼬 목사님의 강연 테이프가 우송되어 왔다. 그 강연 중에서 카가와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 나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금에야 그런 것에 생각이 미쳐서 깨닫는 것이어서 우습지만 여하간 “아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쯔히데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리므로 역사가 바뀐 정도의 변화는 아니다.
노부나가는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의 선배 통치자로서 그들 모두를 영웅시 하는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사고와 사뭇 다른 것이다.
학교도 회사도,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조직체라고 해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유행하는 말로 하면 ‘원점’이다.
우리 일본인에게 ‘패전’은 그런 하나의 되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왜 일본은 전쟁을 했는가? 우리는 어떻게 싸웠는가? 죽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죽었는가? 그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 전쟁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스라엘 민족이 되돌아가야 할 원점은 出(출) 이집트의 체험이었다고 하겠다. p. 254.
자신들의 패전을 당당히 말할 줄 아는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누가 참 일본인인가.
다른 말로, 그들 식 표현으로 하면 진정한 ‘싸무라이’는 누구인가ㅡ
단연 미우라 아야코.
그 외의 자기 나라의 제국주의적 풍토에 대한 반발이 곳곳에 배여난다.
전쟁중에 일본인은 언어사상의 통제를 받았다. 비근한 일로는 레코드를 ‘음반’, 퍼머넌트 웨이브를 ‘전발’이라고 해야 했다. 적성어(敵性語)인 영어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교사직을 맡은 나는 가정시간에 크로스 스티치라는 라는 말을 사용하고 다른 교사한테서 “선생님이 적성어를 쓰셔서야 되겠어요?”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이런 언어상의 일뿐이면 그래도 괜찮다. 천황을 현존 신이라고 하고, 이것에 이의를 주창하는 사람은 당장 투옥되고, 또는 목숨조차 뺏겼다. 그래서 나느 국가가 사상을 통제하고 전쟁에 광분하는 모습과 바벨탑을 건축하는 모습에 공통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p. 85.
그러한 고백은 식민지 약자들에 대한 사고에서 그 꽃을 피운다.
(6) 식민지 약자들에 대한 참회
내가 살고 있는 아사히까와시의 근교에 수난당한 중국인 묘가 있다. 전쟁중 강제노동을 하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병이 들어도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 수난자들은 일본 사람들에 의한 희생자였다.
또 한국 사람들은 그 당시 일본 국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가혹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 또 지금 한국 고교생을 원수처럼 여기는 학생들의 말을 들으면 나는 형용할 수 없이 서글픔을 느낀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당신은 그러고도 일본사람인가?”라고 하면서 노하지만, 일본인이고 일본을 사랑하니까 한층 더 한심함을 느끼는 것이다. 외국인을 압박하고 침략하고 차별한 우리 일본인은 아무리 반성해도 이제는 다 되었다는 것은 없다. p. 154.
이 말은 근간의 시오노 나나미의 발언과는 실로 비교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을 붙였는지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
“위안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며,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섹스 슬레이브(sex slave·성노예)가 된다.”
“인간은 부끄럽거나 나쁜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말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반복해서 질문해도 그 이상의 사실을 말하지 않고 울고 절규하고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끝날 가능성이 크다.”
네덜란드 여성 동원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 이야기가 확산되면 일본에 치명적일 수 있다.”
“정부가 재조사해야 한다.”
디테일하게 비교할 텍스트는 더 많으나 한도 끝도 없으니 이만 하자.
에필로그.
이 두 일본 여성의 텍스트를 비교하면서 실은 현재 우리 사회의 기독교와 연계된 모순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나는 독재자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와 같이 이해의 레토릭을 발휘하는 편인가 아니면 미우라 아야꼬와 같이 단호한가 자문했을 때 들이받히는 모순이다. 나는 양자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나만의 모순이 아니라, 예컨대 어떤 배운 사람들이 선동하기를 최근 회자되는 대형교회 문제, 유명목사 문제가 내부적으로 안 들어먹으면 세상 법 통해서라도 쳐부숴야 한다는 소릴 심심찮게 하는데, 우리나라 독재자들과 그의 옹호자들이 성경 몇몇 구절을 들면서 세상 법에 순종하라고 했을 당시, 그때는 또 세상 법은 무시해야 한다고 했던 전례가 있다. 이것도 우리나라 식 시오노 나나미와 미우라 아야코 간의 충돌이다.
세 번째는 세월호와 관련된 시각에서의 모순인데, 우리가 현재 독재자라고 일컫는 대통령과 로마 대화재를 수습하다 나가 떨어진 네로 황제를 함께 읽을 때 남는 잔상이다. 네로는 사실 좀 억울한 측면이 있고, 시오노 나나미는 네로를 좀 지나치게 파운데이션 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로마에 불이 났을 때 네로가 로마에 없었다는 사실과 우리 대통령이 어디를 가 있었느냐를 따지는 형식도 거의 흡사하다. 우리의 독재자는 네로 처럼 억울한건가. 나쁜 파운데이션인가ㅡ
(아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가 미우라 아야코보다 훨씬 세련되게 늙은 것도 다 모순이다)
어쨌든 국내의 많은 시오노 나나미 팬들이 실망한 것 같은데 일절 실망할 일이 없는 것은 이미 그녀는 원초적 제국주의 마인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로마제국을 통해 자기 모국 ‘일본제국’을 보며, 그리고 썼으며, 그것은 로마인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일본제국인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로마인이야기」에서 들려왔던 넉넉한 아줌마 음성은 어디까지나 김석희 선생의 마술 같이 탁월한 번역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언제나 젊은 이들에게 「로마인이야기」전권을 필독서를 권한 것처럼 읽어두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