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총.균.쇠」라는 문화인류학 명저가 일반 기독교인이 읽기에는 두 가지 강력한 장애 즉 진화론적 전제와 학문적 난제를 안고 있음에도 반드시 탐독할 가치가 있음을 알리고자 작성하였다.

 

프롤로그.

영화 장고에서 백인 농장주가 장고 일행에게 소장하던 해골을 꺼내와 세 개의 홈을 짚어 보이며 골상학적으로 흑인에게는 본질적인 노예근성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예로 잡힌 아내를 빼내려는 장고의 계략을 눈치 채고 자기 집안에 충직했던 흑인 집사 벤의 해골을 톱으로 썰며 겁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장고는 흑인이다.)

골상학이란 중세 이후 사람들이 인간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뇌라는 사실을 파악하자 두개골의 형태나 생김새로 사람의 성격과 심성, 심지어 운명까지도 추정하던 학문이다.

이 책 도입부에서 소개한 대로 저자의 흑인 원주민 친구 얄리로부터 “왜 우리 흑인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라는 질문을 직접 듣는다면 우리 독자는 어떤 답변을 떠올릴까. 두개골의 생김새가 달라서…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골상학을 믿는 사람일 것이고, 복을 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한국 기독교인 일 것이다.

저자는 이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1) 진화론 털고 가기

아직도 진화란 ‘없는 것!’ 하고 단정부터 짓는 기독교인이라면 대개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삽화 정도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저자 다이아몬드가 서론에서 언급한 ‘멸종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인원 친척 세 종’(고릴라, 침팬지, 인간)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적어도 사람을 고릴라나 침팬지와는 다르다고 분류한 점, 그러면서도 인류를 한 종에서 나왔다고 보는 점. 이 두 축이 만드는 좌표는 적어도 처음 사람이 우리처럼 스마트폰 쓰는 현대인이었다고 우기지 않는 한, 인류의 기원을 수백만 년 전으로 보는 진화론일지언정, 성서는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 다음으로 이 책에서 거치적거리는 진화론은 인류의 확산 시기이다.

나는 어린 시절 창세기를 읽으며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첫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끊어진 저편 대륙으로 건널 수 있었을까? 성서적 문명의 성원들이 도저히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할 만한 기술이 없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도 성서적 연대기를 의식한 나머지 지리학 정보는 기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책은 인류가 베링 해협을 통과해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시기를 BC 12000년 정도로 확정 짓고 – 특히 저자는 배를 타고 건넜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추인한다 – 인류의 이동 경로와 시기에 관해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정적 술회를 한다.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지만, 참고로 우리네 창조과학회는 그곳에서 훨씬 이전 연대의 유인원 유골이 많이 발견된다는 자료를 써서 이 진화론적 연대기를 배격해내고 있다. (모든 유골은 그러니까 원숭이 거라는 식.)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다이아몬드는 단호하다. 인류가 단 한번 밖에 발생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단호하며, 그들의 이주와 확산 궤적에 무엇보다 단호하다. 그것이 바로 연대기의 정밀성보다 중요한 책의 본말이며, 규명해나가야 할 주된 내용인 까닭이다. 이 책은 고고학 책이 아닌 것이다. 간혹 우리 중에도 성서를 고고학 전서처럼 손에 꼭 쥐고서 고고학과 싸움을 벌이려는 태도를 가진 기독교인이 있는데 이점을 숙고해 진화론 콤플렉스를 털어낼 필요가 있다.

(2) 총.균.쇠. 중에서 주인공은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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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쇠’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어휘인 동시에 앞서 저자의 친구 얄리가 가리킨 ‘화물’들을 집약시킨 어휘이기도 하다. 그러면 ‘균’이란 무엇인가. 총과 쇠가 정지된 상품이라면 균은 여기서 ‘이동과 확산’을 표징 하는 중요한 개념어이다. 그러면 그 균은 누가 언제 만든 것인가.

‘균’하면 언뜻 보기에 사악한 누군가 고의로 생산한 어떤 것일 성싶지만, 이 책에서의 ‘균’은 정형화 된 문화 과정을 고스란히 은폐하고 있는 문명 자신이다. 초기의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출현했다. 그러다 식물의 작물화에 성공하고, 동물의 가축화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식량 생산 체계를 이루지만 대신 ‘균’은 필연적 산물이다. 특히 동물의 가축화는 그 개화 집단을 보균자로 탈바꿈 시킨다. 그렇게 면역 체계까지 갖춘 문명으로 환골탈퇴 하고나면 이제 어딘가로 이주하고 확산해 나가 그곳에 있던 개체들과 맞닥뜨릴때 그들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이 보균자 집단으로 대체된다. 제거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 궤적이 이 저서가 갖는 핵심 골격이다.

그러므로 총.균.쇠. 중에 주인공은 단연 ‘균’인 것이다.

(3) 유산자와 무산자

따라서 수렵과 채집의 야생은 난폭한 이미지이고 농경생활은 온순한 이미지로 연상되게 마련이지만, 이 책에서 전자는 가장 약한 개체이고 후자가 가장 공격적 문명 체계이다. 곧 유산자와 무산자의 경계는 농업의 힘을 가진 민족과 못 가진 민족의 경계인 것이다. 왜냐하면 식량 생산의 안정은 촌락 생활과 정치를 뒷바침하게 되고, 정치적 뒷바침은 기술 발전에 이어 비로소 다른 영지까지 내다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곡물로 제사를 드린 가인에게서 드러난 호전성, 그리고 그 후예 중에서 기계를 다루는 두발가인의 등장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모든 ‘보균자’ 문명의 핵심 과정은 동물의 가축화인데 그 가축화 개요를 눈여겨 볼 만하다.

(4) 가축화: 부르심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 받은 자는 적다.

지구 역사상 수많은 야생 동물 종들이 있었지만, 오로지 5종만이 지역 구분 없이 인간과 함께 사는 가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닌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식성: 많이 먹으면 같이 살 수 없다. 체중 450kg 소를 키우려면 옥수수 4500kg 정도가 필요하다. 먹은 질료에서 10%를 환원해놓는 셈이다. 그러나 450kg 나가는 야생의 어떤 육식 동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옥수수 45000kg을 먹고 자란 초식 동물 4500kg을 먹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동물은 사람과 함께 살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 성장 속도: 빨리 성장해야만 기를 가치가 있다. 고릴라와 코끼리는 기특할 정도로 먹이를 가리지 않고 아무 것이나 잘 먹지만 장장 15년은 기다려야 한다. 더디 성장하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이다.
ⓒ 감금 상태에서 번식하는 문제: 아무데서나 잘 견디고 번식해야 한다. 치타는 수렵용으로 개보다 월등히 뛰어난 동물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어느 황제는 치타를 1000마리나 길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야생 상태에서 사로잡은 것들이지 길러서 보유한 것이 아니다. 감금 상태에서 치타를 번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야생 동물은 짝을 얻을 때 별난 소리를 내며 폭력적이거나 쓸데없는 의식 치례로 시간과 공간 낭비를 한다.
ⓓ 골치 아픈 성격: 못된 성품의 종자는 집에 들일 수가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회색곰이다. 일본의 아이누족은 회색곰 새끼를 일상적으로 길러본 예가 있는데 대개 한 살가량 되었을 때까지만 기르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회색곰을 그 이상 기르는 것은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 자라나서도 길 들어 얌전한 회색곰은 본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야생의 종자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담벼락에 머리를 받고 죽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 사회적 구조: 이미 사람과 주거하는 동물은 대부분 사회적 특성을 가진 동물이다. 말의 무리는 가장 높은 암컷을 따라가듯이 줄지어 인간 지도자를 따라간다. 양도 그렇지.
이것은 자기 종족 리더와 인간 지도자를 헷갈리는 멍청함 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탁월한 영민함이다. 이런 동물은 우세한 지도자를 본능적으로 따르며 인간을 지도자로 기억하기 때문에 데리고 살기에 적합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이러한 요약은 결국 이 같은 인공 환경을 선점하게 되는 성패가 곧 지배하는 문명과 지배 받는 문명을 가르는 성패라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 인종에 따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적합한 조건의 동물과 식물들이 분포된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사실 규명에 종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주거’를 위한 조건들을 우리 인간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 데리고 살만한 조건을 갖고 있는지.)

(5) 지배하는 문명, 지배 받는 문명

얼마전 인문학 강의를 한 학기 하면서 영화 아바타(2009)를 종교개혁과 연결 지은 논제로 발표해보라는 과제를 낸 일이 있다. 한 학생이 “아바타가 주는 영상 이미지는 주술과 샤머니즘의 혼합이요, 이 같은 악마의 전략을 폭로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라는 논지의 발표를 하였다. 이 암담한 발표를 듣고서는 곧바로 미국이 과거 피지배 민족에게 한 일에 대한 반성을 카메룬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꾀하고 있는 지를 분석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학생의 신앙에는 영 와 닿지 않았던지 기말 강의 평가란에 “교수님 참진리를 만나시길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책이 꾀하는 1차적 의제 역시 피지배 문명에 대한 지배 계층의 정당성을 분쇄하는 데 있다. 인디언의 주술을 응징의 대상으로만 보는 그 학생의 기독교,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인디언들에게 실행했던 백인들의 기독교는 유사점이 많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백인들이 천연두 균이 배인 담요를 원주민 추장에게 선물했던 사례도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 지배하는 문명의 ‘균’이란 이미 그 문명 자신인 것이며, 그들이 체제가 늦은 문명에 당도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아내 삼고 땅은 차지하는 동안 아무런 면역체계가 없는 이들은 제거 당하거나 지배 받는 문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침탈 과정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침탈 과정, 그리고 동아시아 민족들의 침탈 과정 등을 위의 도식에 맞춰 전개함으로써 오늘 날에도 흔적으로 남아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인종적 현상’은 결코 인종이 아닌 환경의 문제라는 테제를 완성해낸다.

책의 나머지 내용들은 이 같은 도식의 보편율에 맞지 않는 불규칙 현상들에 대한 보편율 작업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유럽의 만성적 분열과 중국의 만성적 통일’(분열에 만성인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삼켰고 통일에 만성인 중국은 왜 그렇지 못했나)이라든지 ‘로마 같은 문명이 개화되지 않은 민족에게 패한’ 예외라든지, 특수성에 대한 해명이다. 심지어 석유를 차지한 자가 정복자이거나 수혜자라는 현대적 가치관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부일 뿐, 기본적으로는 모두 작물화, 가축화에 성공한 자의 유산을 토대로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6) 기술로서 문자: 태초에 문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화물 즉, 총과 쇠의 확보는 누가 먼저 작물화와 가축화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것은 누가 먼저 그 작물화와 가축화에 적합한 입지와 환경을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총과 쇠는 수렵과 채집인의 상징이 아닌 농경 사회 곧 ‘기술’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기술의 궁극은 바로 ‘문자’에서 귀결된다. 문자 자신은 정보이기 때문이다. 대개 문자를 가진 문명이 더 먼 거리까지 지배할 수 있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자’에 관한 통찰은 그것만으로도 기독교적 가치로의 환원이 된다. 그 가운데 백미는 ‘알파벳’의 발원이 단 한 차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인류가 한 장소에서 단 한 번 발생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성서의 본질에 종사한다.

설형문자, 상형문자, 그림문자.., 문자의 독립적 창제는 수메르, 멕시코 인디언, 이집트, 중국에서 각각 개시되었지만, 알파벳 형식의 문자 창제는 단 한 차례였으며 그것은 바로 셈족 계열에서 일어났다.

א ב ג ד

히브리어는 모음이 나중에 편의로 생겨났지만 알파벳 세트를 구사하는 문자 체계의 원형에 속한다. 희랍어의 α β γ δ… 영어의 a b c d…에 모두 흔적이 남아있다. 저자는 아울러 영어를 전혀 모르는 체로키족이 영어 알파벳을 이용해 자기말 알파벳을 창제하는 과정 통해 이 알파벳 체계의 확산 궤적 역시 추인해낸다. 우리나라의 ㄱㄴㄷㄹ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문자이다.

이러한 문자 방식은 그림문자나 여타의 비 알파벳 방식보다 효율적이다. 예컨대, “살진 양 27마리를 국가에 인도할 것을 존에게 명령한다”라고 써야 하는데 알파벳의 디테일에 미치지 못하는 문자는 단지 “존 27 살진 양” 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력으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겠나.)

오늘 날 저마다 말씀, 말씀…을 강조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다바르, 로고스의 의미는 다 고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형이상학적 고찰이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이라는 테제는 알파벳 문자로서 직설적 힘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결코 로고스에 부차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이 그것을 조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문자에 보존되었다는 테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빛보다도 먼저 만든 것이 바로 문자라는 히브리인들의 관념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또 “나는 알파(A)와 오메가(Ω)라”는 로고스 헬라세계의 마지막 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7) 방법론

이 책은 그 명성만큼이나 문제가 제기된 책이다. 연대기 정보와 같은 사소한 이견뿐 아니라, 탈식민지론 책이지만 그 무엇보다 식민지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지적이라든지, 자신의 전공을 넘어선 저술 행태라든지, 그리고 이러한 학술적 문제제기 외에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아마도 자신의 글의 소재로 삼은 원주민에게 소송까지 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 뉴기니와 같이 동시대의 낙후한 풍속과 관습을 이용해 인문 사회학적 정보로 가공하는 방식은 이미 100여 년 전부터 있던 방법이다. 프로이트도 그러한 방법을 통해 심리학적 성과를 거둔 바 있으며, 프로이트가 줄기차게 인용했던 J. G. 프레이저의 성과물들도 역시 자신은 연구실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집필한 성과들이었다. 즉 우리가 13000년을 모두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게시한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저런 잡음에도 탈색되지 않는 이 책이 가져온 성과는 탈식민주의 사관 내지는 탈 인종주의라는 1차적 과업 외에도, 지구촌을 지배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목적론에 도전해 보편율을 탈환해낸 성과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그 보편율 작업을 환경이라는 ‘불규칙성’을 가지고 일구어냈다는 것이 이 책의 독창성이다.

(8) 적용과 전망

현대 과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분화 되고 발달하여 저마다 보편율에 종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21세기 과학 최고의 산물 뇌 과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것은 앞서 유사과학으로 퇴출 명령을 받았던 골상학의 행태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특별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요인을 그 뇌 속의 물리적 요인에서 발견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사람은 뇌 속에 그런 유전자를 타고나는 것이다.

목적율은 이와 같이 현대 과학적 보편율에서도 맹위를 털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우리 신앙 속에서도 그 맹위는 식지 않는다. 우리에게 복 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의 경계로 군림한다. 그렇지 않나?

 

에필로그.

쿠엔틴 타란티노가 감독한 2012년판 장고(Django)의 백인 농장주 캘빈 캔디는 자기 소유 노예에게 ‘삼총사’의 달타냥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프랑스 문학 애호가다. 앞서 프롤로그에 소개한 스컬 신(Skull Sene)에서 모든 것이 탄로 난 뒤, 그와 장고를 돕는 백인 총잡이 사이에 이런 대사가 오간다.

농장주 캔디: 케이크?
총잡이 닥터 슐츠: 단것은 안 먹어서…
농장주 캔디: 들통 난 게 분하신가?
총잡이 닥터 슐츠: 당신이 개한테 먹인 그 친구를 생각했지.
농장주 캔디: 달타냥?
총잡이 닥터 슐츠: 뒤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군.
농장주 캔디: 누구?
총잡이 닥터 슐츠: 알렉상드르 뒤마! ‘삼총사’를 쓴 작가지.
농장주 캔디: 그렇군.
총잡이 닥터 슐츠: 그의 팬이겠지? 주인공 이름을 노예한테 붙일 정도니. 만약 뒤마가 오늘 일을(달타냥이 개에게 먹힌 일) 봤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농장주 캔디: 용납 안 했다?
총잡이 닥터 슐츠: 그래, 절대 용납 안 했을 거야.
농장주 캔디: 감상적인 프랑스인이군.
총잡이 닥터 슐츠: 뒤마는 흑인이야.

 
이 백인 총잡이 슐츠는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백인 농장주 캔디의 인종주의를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고, 장고에게 미안하단 말을 남긴채 캔디에게 총을 쏘고 자신도 죽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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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총.균.쇠」를 기독교인이 읽는 요령”에 대한 2개의 생각

  1. "…이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침탈 과정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침탈 과정, 그리고 동아시아 민족들의 침탈 과정 등을 위의 도식에 맞춰 전개함으로써 오늘 날에도 흔적으로 남아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인종적 현상’은 결코 인종이 아닌 환경의 문제라는 테제를 완성해낸다…."

    제가 성격이 급하고 게을러서….. 남들이 정리해 놓은 요점정리만 소옥… 빼먹기를 좋아하는데… 이 명저"Guns, Germs, and Steel"의 결론을 환경 한 마디로 이해 하였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영어 공부할 겸 읽어 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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