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 hemelvaart van Maria, Rubens, circa 1626

우리나라에서는 8.15광복절인 가운데 카톨릭의 성모승천대축일(8.15)과 맞물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체류중이다.

개신교 신앙과 교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모승천’ 교리는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개신교 입장에서의 비판적 설명은 이미 많이 접했겠지만, 오히려 그런 감정 섞인 전달은 제대로 된 이해에 방해로 작용할 수 있다. 감정이입이 제거된 자료 즉, 카톨릭 편에서 사용하는 자료를 직접 읽어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고 바른 이해를 전달할 것이다.

카톨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권위 있는 사전류는 대략 세 개인 것 같다. 카톨릭 대사전, 용어사전, 전례 사전.

참고로 이들에게는 ‘전례 사전’으로 명명되는 사전이 보전되고 있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카톨릭 대사전에서는 성모승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녀 마리아는 지상생활을 마친 후 그 영혼과 육신을 지닌 채 하늘의 영광으로 영입(迎入)되었다”(Munificentissimus Deus)는 교의. 이는 수세기 동안 신자들이 믿어 왔던 신비였는데 교황 비오 12세가 1950년 이를 교의로 선포하였다. 성서에는 성모승천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으나 교황은 이 진리의 궁극적인 근거가 성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그리스도 교인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이므로(1고린 15:14-57) 이는 마리아의 부활에 대하여도 그러하다. 더구나 루가 1:28·42에서 마리아께 주어진 은총의 가득함은 성모승천으로 성취되었다(MD 27). 그리스도 교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부활에 참여하나 아직 그 완성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죄의 결과인 죽음과 부패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그분과 운명을 같이 하였으며 죄가 없으므로 부활이 지연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묵시록(12:1)은 교회의 종말론적 상징을 마리아의 모습으로 의인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모승천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서에 함축되고 교부들의 저서에 구체화된 관념은 새로운 이브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것이다. 첫 이브는 하느님의 의도대로 아담의 조력자가 되지 못하고 하느님을 거역하여 범죄에 협력함으로써 인류에게 죽음을 초래하였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이브인 마리아는 천사의 영보에 순명하여 새로운 아담을 잉태하였고 탄생, 첫 기적, 십자가의 죽음, 승천, 성신강림에 이르기까지 구속사업의 완성에 협력함으로써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온바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에 관한 평가가 이브에게 어느 정도 해당되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마리아에게 어느 정도 적용된다 하겠다.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는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에서 시작되어 기적적인 승천에서 종료되었다고 그리스도 교인들은 수세기를 두고 직관하여 온 것이다. 비오 12세는 또 성모승천의 신학적인 이유로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든다. 초대 교부들은 마리아의 아들이 지닌 신성(神性)을 입증하고 마리아의 무죄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동정을 변호하였다.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사랑하고 구속 신비에 마리아와 결합하였다는 사실에서, 죄 없이 창조되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동정녀는 그리스도가 당신 승천에서 죄와 죽음을 이겼듯이 마리아의 승천에서 죽음에 대한 개가를 올린 것이다.

마리아가 승천하기 전에 죽음을 겪었는지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긍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비록 죄없다 하여도 유한한 인성(人性)을 타고 났으며, 매사에서 그리스도에 순응했던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다는 점에서 마리아가 죽음을 겪었다는 견해가 타당하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적 성결에 지나치게 과잉한 나머지 – 그리스도의 성결 강조가 과잉되다고 하는 내가 이상해지지만 그게 함정 – 그 태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거기에서도 부족한 나머지, 마리아의 태생과 삶 그리고 종결에 이르기까지 성결로 감싸려다 보니 확대된 교리.

이 확대된 교리는 또 이브의 실패를 두번째 이브(마리아)가 완성했다고 연결 짓는 과잉을 낳는다.
(성서에서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첫째 아담, 둘재 아담 메타포만 들어와 정경 확정 된 상태)

다음은 용어사전집에서의 설명이다.

 [의의] 이는 마리아가 지상 생활을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려지심을 말한다. 이는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피승천(被昇天)이다.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종신토록 동정이시고,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선언] 1950년 ‘가장 풍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이라는 회칙을 통해,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티 없이 깨끗한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친 후,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상 천하의 모후로 추대를 받으셨다”고 선언하였다.

[확신] 교회는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의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었다”(교회 헌장 59항)고 선언하였다. 초세기부터 신자들은 마리아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으셨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도, 강론, 신심 행위, 서적 등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당, 수도 단체, 도시, 국가 등을 승천의 이름으로 그분께 바치거나 축복하기도 하였다. 물론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시대부터 교회에 의해서 밝혀지고 선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죄 없는 잉태, 영원한 동정성,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완전함과 친밀한 관계는 승천을 확신케 한다. 또한 성서에는 확실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서에서 예수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리고 마리아의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며 마리아는 그분의 어머니이시다. 또한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과는 긴밀히 결합된 분이시다. 따라서 성서 전체를 숙고해 볼 때, 마리아는 확실히 당신의 아드님을 따라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승천을 확신케 한다(1고린 15장; 루가 1장; 묵시 12장). 4세기 중반에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이 기념일로 받아들여졌고, 7세기에는 동방에서, 그리고 8세기에는 서방에서 마리아의 승천 축일을 지냈다. 

다음은 전례 사전집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뒤에 영혼과 육신이 모두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를 경축하는 의무 축일(8월 15일)이다. 일차적으로 성전에 근거하는 이 교의는 마리아의 죄 없음,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심, 지속적인 동정성, 구원 사업에 참여한 것에 기초를 둔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썩지 않은 채 당신 아드님의 육체적 영광에 참여하게 되셨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해 교회는 마리아께서 구원에서 차지하시는 역할에 대해 정당한 공경을 드리도록 할 뿐 아니라 값진 진리를 일깨워 준다. 마리아의 모성이 당신 아드님을 통해 구원으로 이끄심으로써 온 세상을 위한 은총이 되듯이, 마리아께서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것은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늘로 부름을 받는 승천의 시작이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우리 몸(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안에 영원의 씨앗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의 승천은 우리도 몸과 영혼을 지니고 영원히 천국으로 올라가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전례 사전집에서는 그 성결의 과잉이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더 높이) 밀어내고 마리아의 인성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조망된다는 취지로 전개 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밑줄 중심으로 읽다보면 위 인용집들의 내용 대부분은 전례와 회의 그리고 선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이들의 권위 사전에 ‘전례 사전’이 포함된 이유이기도 하다. (‘개신교엔 제대로 통일된 사전도 하나 없어!’ 하다가도 오히려 그게 다행.)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르는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차이이다. 다시 말하면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권위의 차이이다.

개신교는 텍스트에 1차 권위를 두는 종교이지만,
카톨릭은 전례에 1차 권위를 두는 종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선택은 그릇된 선택이지만 악랄한 선택은 아니다. 왜냐하면 개신교 역시 텍스트에 1차적 권위를 둔다고는 하지만 어떠한 텍스트도 ‘해석’ 없이 전례된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교도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구약의 텍스트를 오늘날 해석없이 받아들여 실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어떤 개신교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는 퇴보하지만 어떤 교회는 진보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카톨릭 교회도 그 교황에 따라 그 교회가 지옥으로 떨어진 시대가 있었는가하면 천국에 이른 시절도 있었다. 양자의 공통점은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개신교와 카톨릭의 텍스트 해성상 극명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시간 기점으로 회귀하려는 관성을 가졌느냐 아니면 그 시간 밖으로 나가려는 관성을 가졌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카톨릭의 해석은 매우 자유로운 관성을 지니고 있다.

텍스트에서는 명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전례와 토대를 근거로 그 시대의 교황이 확정하면 그것에 곧바로 성경을 압도하는 권위가 부여되는 구조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무시하였다고 이들은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이미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성모승천대축일(8.15). 이 교리는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교리이다. 1950년대에 비오 XII세라는 교황에 의해 선포된, 교황이라는 직제의 교리 보다도 짧은 역사를 지닌 교리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모’보다는 ‘교황’이 더 큰 문제이다. 성모승천이라는 교리보다는 교황이라는 직제 자체가 그릇된 교리 성립의 근본적인 진원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비오 XII세 이 교리를 선포한 직후 공교롭게도 세계는 공산화 물결을 맞는다.

 

에필로그.

나는 금번 교황의 방한에 즈음하여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는 이 방만한 교리들을 카톨릭 일반 신자들은 차치하더라도, 사제들 모두는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내가 아는 어떤 카톨릭 사제나 학자들은 매우 건강한 성경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신교만 하더라도 어떤 사안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목소리가 안 들리는 이유는 말 그대로 카톨릭, 보편/일치가 제1 기치이어서 아닐까 싶기도.)

두 번째는 특히 방한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께 궁금한 사항이다. 우리 개신교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영광 받기 십상이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받는 칭송, 찬양인도를 잘하는 찬양사역자가 받는 칭송, 그런 때에는 스스로들 이르기를 “이래선 안 되지.” “영광은 하나님 것인데.” “두렵고 떨린다.” 이런 생각들이 들게 마련인데,

눈이 움푹들어가서 정말 뭐 같이 생겼던 전임 교황들에 비하면 이웃집 아저씨 같기만 한 쉐이프를 타고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뜩이나 더 인기가 많은데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그 점이 궁금한 것이다.

Pope Benedict

왜냐하면 그도 성경을 읽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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