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신분제 사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분제 없는 사회란 없었지만 특히나 현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신분적 잔재의 모체는 조선시대라 하겠다.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그 시대 초기에는 천인(노비)을 제외한 양반, 중인, 서민들이 역(役)과 세(稅)를 부담하는 사회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양반만 지위가 상승하고 나머지는 노비와 함께 지위가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게 편 방향으로 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를 일구기 위해서는 개량 농법, (수)공업 발달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그러한 경제적 출구가 신분적 출구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어떤 음성적 신분세탁은 차치하더라도, 경제 중심 구조 자체가 그것을 이완시키고 재편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 빚어지는 신분 갈등이란 사실 그 특권을 영속시키고자 했던 양반의 욕망과 그 천한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상민들의 욕구의 충돌이 낳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이미 16세기 유럽이 종교개혁 전후로 세속영주와 주종관계가 없는 경제인 – 상인, 선원, 기업가, 은행가 등 도시의 신흥 자유 시민들 – 중심으로 계층 구조가 재편되었던 것과 일반이다. 우리나라나 유럽이나 격변을 겪은 이들 사회가 어떤 경제적 역동을 통해 이전의 불합리한 족벌 체제를 이완 시키고 쇄신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특권을 향유하고 영속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족벌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그 중심이 경제라는 체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프린서플 | 족보가 없는 사람들

유대인들의 사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미 성경에서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가 소개되고 있으며 그 파벌 내에서도 스승에 따라 갈리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을 문파로 소개한 바 있으며(행 22:3) 자신을 베냐민 지파로 자부하기도 했다(롬 11:1). 왕을 배출한 지파로서 그것은 회심 전까지만 해도 자부할 만한 것이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왕의 혈통은 제사장 혈통과 함께 전통적 최상위 계급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신앙으로 대망했던 메시야 정체성과도 일치를 이루는 관념이었다. 구약시대로부터 왕 또는 제사장으로서 메시야가 이미지화가 되어 투명되어 온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헤롯 왕이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에서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는 현직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혈통 면에 있어서 언제나 열등감이 있었다. 동방박사 말을 듣고 메시야 출신지를 추적하고 또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행위는 그 정치적 열등감을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그는 그러한 자신의 핸디캡을 <멜기세덱>이라는 당대의 인물 상(像)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는 사료가 있다(F. F. Bruce). 헤롯이 그를 통해 자기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에게는 미비한 그 어떤 ‘전통’을 확보하고자 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갖는 위치에 기인한다.


첫째, 그는 살렘의 왕이었다.
살렘이라는 지명은 정경 속에서는 희미하게 그 발음으로만 남아 있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을 맺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다윗 왕의 성지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터전이며 결국에 가서는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 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선재 된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브라함을 만난 자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시조와도 같은 지위이다. 열두 지파의 할아버지이다. 왕을 배출한 지파든 제사장을 배출한 지파든 모든 지파들이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이미 앞서 만났고, 또 그에게 복을 빌어주었던 제사장이 현현 한다면 그는 그 모든 지파 서열보다도 앞선 제사장인 것이다.

셋째, 그는 족보가 없는 자이다. 
멜기세덱의 정체성은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알 길이 없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족보 없음>을 예수님의 메시야 정체성으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누가 멜기세덱인가

그러나 한편에서 헤롯 왕과 같은 세속의 왕 역시 자기에게 그 정체성을 참칭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세상의 왕 곧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 메시야 콤플렉스에 빠져서 산다. 그렇지만 그가 투영한 것이 세속의 왕인지 아니면 우리 살렘 왕/대제사장 예수님의 제자인지는 금방 판별할 수 있다. 바로 <섬김>이다.
그러므로 <족보 없음>이란 어떤 서열을 무시해도 좋다거나 전통과 근본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섬김을 통해서 그 차별을 극복하는 영원한 관계라는 점에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과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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