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사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미 성경에서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가 소개되고 있으며 그 파벌 내에서도 스승에 따라 갈리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을 문파로 소개한 바 있으며(행 22:3) 자신을 베냐민 지파로 자부하기도 했다(롬 11:1). 왕을 배출한 지파로서 그것은 회심 전까지만 해도 자부할 만한 것이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왕의 혈통은 제사장 혈통과 함께 전통적 최상위 계급층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신앙으로 대망했던 메시야 정체성과도 일치를 이루는 관념이었다. 구약시대로부터 왕 또는 제사장으로서 메시야가 이미지화가 되어 투명되어 온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헤롯 왕이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에서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는 현직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혈통 면에 있어서 언제나 열등감이 있었다. 동방박사 말을 듣고 메시야 출신지를 추적하고 또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행위는 그 정치적 열등감을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그는 그러한 자신의 핸디캡을 <멜기세덱>이라는 당대의 인물 상(像)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는 사료가 있다(F. F. Bruce). 헤롯이 그를 통해 자기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에게는 미비한 그 어떤 ‘전통’을 확보하고자 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갖는 위치에 기인한다.
첫째, 그는 살렘의 왕이었다.
살렘이라는 지명은 정경 속에서는 희미하게 그 발음으로만 남아 있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을 맺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다윗 왕의 성지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터전이며 결국에 가서는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 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선재 된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브라함을 만난 자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시조와도 같은 지위이다. 열두 지파의 할아버지이다. 왕을 배출한 지파든 제사장을 배출한 지파든 모든 지파들이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이미 앞서 만났고, 또 그에게 복을 빌어주었던 제사장이 현현 한다면 그는 그 모든 지파 서열보다도 앞선 제사장인 것이다.
셋째, 그는 족보가 없는 자이다.
멜기세덱의 정체성은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지에 관한 정보는 알 길이 없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족보 없음>을 예수님의 메시야 정체성으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누가 멜기세덱인가
그러나 한편에서 헤롯 왕과 같은 세속의 왕 역시 자기에게 그 정체성을 참칭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세상의 왕 곧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 메시야 콤플렉스에 빠져서 산다. 그렇지만 그가 투영한 것이 세속의 왕인지 아니면 우리 살렘 왕/대제사장 예수님의 제자인지는 금방 판별할 수 있다. 바로 <섬김>이다.
그러므로 <족보 없음>이란 어떤 서열을 무시해도 좋다거나 전통과 근본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섬김을 통해서 그 차별을 극복하는 영원한 관계라는 점에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과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