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사람만 가능하다. 나를 일종의 타자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는 이 능력을 통해 나 자신을 어디론가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혹은 미래로.
여기서 말하는 과거와 미래의 구체적 실체는 죽음이다. 두려움도 여기서 발생한다. 죽음은 통증이 아닌데도 두려움인 것은 그것이 종료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강박을 타고 산출 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망각하려고 현재에 몰입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죽음을 숭배함으로 현재를 회피한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 숭배의 대상을 그때그때 탈바꿈 시킬 수 있도록 그 산출된 시간이 그 일을 돕고 있다. 대개는 일차적으로 죽음을 시간으로 바꾼 다음,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나 자신을 치환해내는 방식의 기술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의 자아는 시간으로 협박을 하거나 시간으로 달래는 신이 아니라 그 시간의 허리를 끊은 존재자다(요 4:23; 5:25). 시작과 끝을 거머쥔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그가 구현하는 소급 원리이기도 하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나는 과거의 나에게로 몸을 던져 그 자아와 함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리고는 다시 미래의 나에게로 몸을 내던져 그 자아와 더불어 살아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사고가 갖는 유적(有的) 권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나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하는(창 3:10; c.f. 2:25) 인식 상태로 내던져지는 그 무적(無的)인 힘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포지티브 내지 내거티브인 셈이다.
이렇게 하여 그 분 자신은 악의 어떤 대항(립)자로서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선과 악의 초월자 지위를 또한 구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