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꿈 깨는 이야기
프린서플 | 꿈에 관한 하나님의 전개 방식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구나”(삼하 7:2) 하는 마음이 다윗의 꿈이었습니다. 대적을 물리쳐주시면 내가 성전을 짓겠다거나 내가 정권을 잡으면 성전을 짓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는 작은 탄식이 바로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자기 대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피를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8:3). 대신 아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을 확충하고 죽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꿈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은 나라 전체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분열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본문과 같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꿈 곧, 아버지가 받았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토대로 하는, 성전 중심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성실한 신앙, 건축으로 야기된 분열의 씨,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그 모든 비전과 꿈은 사실상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꿈은 붕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의 질료는 예수님의 몸을 통해 완전한 형식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부정하심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의 꿈은 사실상 부정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부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꿈이 부정되었고 – 그는 처음 이삭의 출생을 믿지 못했습니다 – 야곱의 계획도 처음엔 부정되었고, 요셉의 꿈 또한 부정되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뜻조차 포기되었습니다.
둘째, 긍정하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뜻이 땅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모든 꿈이 다시 재편된 것입니다. 아니, 아예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꿈의 진정한 의미를 삶의 부정하심을 통해 발견했고, 야곱이 받아낸 이스라엘이라는 꿈의 이름 역시 부정하심의 역사 속에서 그 심원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 긍정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정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셋째,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그들 모든 개인적인 꿈들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일체를 예수님의 몸,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처음 부정되었던 것도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긍정하심도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려는 우리의 머나 먼 미래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에 관한 전개 방식입니다.
에필로그 | 쪼갤 수도 섞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꿈
따라서 그 꿈, 곧 그 유일한 선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쪼갤 수도, 섞을 수도, 그리고 바꿀 수도 없는 그 자체로서 가치입니다. 그 선물을 성령이라고 부르며(행 2;38), 폰티악 G-6나 뉴비틀즈 같이 환금(換金) 가치 이벤트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본문, 왕상 8:41-43, (c.f. 1, 6, 10-11, 22-30).
(c.f. 시 84; 엡 6:10-20; 요 6:5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