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결여됨> 혹은 <결핍>을 통해 “의도”라고 하는 지향성이 생겨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사유”라고 부른다. 이것이 실로 그러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이 공백과도 같은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결핍” 그 자체를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가능성”이라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그 결핍 대신에 “욕구”라는 표현을 썼고 아울러 충동이라는 내부 구조를 통해서 출현하게 된 외부 세계를 밝혀냈다.
마틴 하이데거는 그 결핍의 인식을 “처해 있음”이라는 불안 증세로 설명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처해 있음”이라는 강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을 통해 <기투>라는 이 세상의 설계 구조를 밝혀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갓난아기의 울음의 원인을 이 “처해있음” 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며, 마찬가지로 “내던져진 것”과도 같은 우리 자신의 이 내면의 느낌을 <기투> 말고 무엇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파스칼이 이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우리 인간들에게는 채울 수 없는 공백(공간)이 있다고 일찍부터 일러두었다.
우리가 <결핍>과 <욕구>로 둘러싸여진 <처해있는> 존재라는 것은 지당한 발견이다. 언제나 그런 원리였던 것처럼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이 결핍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짊어진 결핍을 통해 밝혀졌다.
니이체는 “나는 무척 독립을 갈망한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에 내 모든 걸 희생시켜도 좋다. 아마도 내가 가장 의존적인 영혼을 지녔기에,… 다른 사람이 쇠사슬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죽기 10년 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이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된 채로 살아갔다.
파스칼 역시 고통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애 말기에 지독한 치통에 이어 끊임없는 두통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천연두에 걸린 가난한 가족에게 자기 집을 내주고 시집간 누이 집에 얹혀살았다. 그는 39세에 죽는다.
결핍을 밝혀낸 결핍어린 삶들을 향해, 우리는 어떤 사람은 사악하게 묘사하고 어떤 사람은 성자처럼 묘사하지만 모두가 “처해짐”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간다.
다만 우리가 파스칼을 기억하는 것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아서이거나 행복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 결핍 즉, 공백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빈 공간이 존재한다” -블레이즈 파스칼-
“There is a God shaped vacuum in the heart of every man which cannot be filled by any created thing, but only by God, the Creator, made known through Jesus.” -Blaise Pascal, Pens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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