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쌍의 ‘때’. 매년 성서일과 상에서 송구영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도서 3장의 핵심 메시지는 ‘때’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열네 쌍의 때(tim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열네 쌍의 ‘때’가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적인 의식과 체험을 가미해 서술식으로 나열해보고자 합니다.
가장 첫 번째 ‘때’인 ⑴ ‘날 때’와 ‘죽을 때’를 처음으로 안 것은 나이 8세 때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때였습니다. 과거형에 추론을 입혀 서술하는 것은 오랜 세월 후에야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_2024-12-31: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임종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의식이 얼마 전부터 들기 시작했다는 걸 추가합니다. 그리고 3년 전쯤엔 제 자신의 죽음 가까이에 가 보았다는 사실도 추가해야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입니다.)
그 다음 쌍인 ⑵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는 내가 성실하게 섬기던 교회에서 나 스스로를 뽑은 때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뽑은 게 아니라, ‘심었다가 뽑은’ 타이밍에 관한 ‘때’였습니다. 이 타이밍은 다양한 결과를 돌려주었습니다.
⑶ 죽일 때와 치료할 때. 여기서의 죽일 때(to kill)는 앞의 ⑴에서 죽을 때/무트(מ֑וּת, to die)와는 다른 것입니다. 자연사를 포함하는 무트와는 달리 죽일 때/하라그(הָרַג)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죽인 것인지 주어는 없지만, 단순히 죽기만(to die)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죽이는’(to kill) 때였고, 따라서 치료하는 것/라파(רָפָא) 역시 자연적 치유를 넘어 누군가의 의도로서 치료가 깃들었던 때를 말합니다. (_2024-12-31: 자연사 죽음과 의도적 죽임의 경계를 구별하기 어렵듯이, 자연적 치유와 의도적 치료의 경계를 세우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는 도리어 그 구별의 경계를 허무는 관성의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셨는지 시간이 해결해주었는지 구별이 모호해지는 걸 말합니다.)
⑷ 헐 때와 세울 때. 나의 고대했던 어떤 것들이 수도 없이 헐린 경험이 있지만, 이 작은 교회 미문(美門)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헐릴 수 있습니다. (_2025-01-01: ‘다시 헐릴 수 있다’라는 기록이 지금으로부터 이미 7년 전에 실현되었음을 이제서야 추가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서의 美門이 다시 세워져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 폭넓게 그리고 더 자유로워진 개념으로 존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것으로 읽고 있습니다.)
⑸ 울 때와 웃을 때, 그리고 ⑹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이 오르락내리락 출렁이는 네 가지 체험을 조울증이라 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때’(time)로 이해된 체험들이 오늘날에는 심리학의 침공으로 조울증으로 전락했지만, ‘때’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백이 조울증으로 둔갑하는 악순환입니다. 여러분의 때는 때입니까, 조울증입니까?
⑺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 기본적으로 돌이란 어떤 일의 기초를 말합니다. 그래서 돌은 어떤 서약, 맹약을 표지합니다. 다시 말하면 ‘돌을 던져 버릴 때와 거둘 때’란 버려졌던 약속을 다시 집어들 때라는 사실입니다. (_2025-01-01: 엊그제 한 장로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담임목회자 청빙 공고를 냈더니 불과 몇 주만에 40-50명의 목회자 이력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식 광고도 아니고 지인들에게만 부탁했는데도 그렇다네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회자 안수를 받은 분의 70퍼센트 정도가 성례에서 소외된 상태라고 봅니다. 성찬과 세례 집전에 참여를 못하는 목회자가 10명 중 6명이란 뜻입니다. 돌을 던져 버리지 말아야 할 텐데요.)
⑻ 안을 때(받아들일 때)와 안은 것을 멀리할 때. ‘나는 왜 저 사람과 멀어졌을까?’ 이제 우리는 ‘저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에 멀어졌어.’라고 말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합니다. (_2024-01-01: 가까워진 사람보다 멀어진 사람이 더 많아진 ‘때’입니다. 이 역시 ‘때’가 지닌 양상입니다.)
그 외에 ⑼ 찾을 때와 잃을 때, ⑽ 지킬 때와 버릴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백세에 겨우 얻은 아들을 바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곧이곧대로) 바치라는 것은 잘못된 (문자적) 해석이며,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니 하나님은 속성(성품)상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길지는 몰라도 여기서 말하는 ‘잃을 때’란 그런 해석의 단계를 다 넘어선 ‘때’를 말합니다. 해석을 동원하는 단계를 넘어 진짜로 모두 다 잃은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잃어 놓고선, 자신이 버린 거라며 ‘버릴 때’로 둔갑시키는 위선의 때도 있습니다.
⑾ 찢을 때와 꿰맬 때. 찢어지면 상점에 가서 새로 구입해 쓰면 될 일이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 사서 구비해놓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꿰맸기 때문에 상처도 남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⑿ 잠잠할 때와 말할 때. 가급적이면 남들이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러고는 남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는 매우 고단한 일입니다. 침묵을 ‘때’로 강요 받을 때는 더욱 고단할 것입니다.
⒀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어제까지도 사랑했던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던 바로 그것을 또 사랑하게(또는 사랑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모든 굴절에는 ‘때’가 끼어 있습니다.
⒁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 여기 전도서 3장에서 말하는 전쟁과 평화는 패자의 전쟁과 평화를 말합니다. 승자가 기록하는 전쟁과 평화는 이런 식으로 서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가족과 신앙이 궤멸당하고, 그러고도 남은(remnant) 모진 생명으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을 ‘때’였음이 확실합니다. 더 나아가 포로/노예로서의 ‘때’마저 다 차오르던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해방/평화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평화가 때를 끊은 것입니까?
만약 승자의 전쟁과 평화였다면 필경 상기의 모든 ‘때’에 주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열네 쌍의 ‘때’에는 주어가 없는 바람에 악이 도래하기까지의 근원/주격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해 바로 이 ‘때’가 대체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때’가 그리하였다고 이렇게 길게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 ‘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종류의 ‘때’. 이들 열네 쌍의 ‘때’를 시작하는 전도서 3장 1절(“하늘 아래 범사에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에서 앞의 때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뒤의 때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라고들 정의합니다.
그렇지만 3장 1절 이후에 펼치는 열네 쌍의 때, 즉 스물여덟 개의 때는 모두 카이로스일 뿐입니다. 왜 카이로스뿐일까?
카이로스는 자상하지만 크로노스는 무자비할 따름입니다. 죽을 때가 날 때를 집어 삼키고, 뽑을 때가 심을 때를 집어 삼키며, 치료할 때가 죽일 때를 집어 삼키며…, 그리고 세울 때가 헐 때를 집어 삼킬 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평화가 그 전쟁을 집어 삼키는 것입니다. 전쟁을 집어삼키는 것은 카이로스인 평화라기보다는 무자비한 크로노스입니다. 전체의 때를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자비한 크로노스의 중간을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끊을 수는 있지만 무자비한 크로노스는 그 순간을 이내 잠식합니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다시금 평화의 순간 카이로스를 몰고 옵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제는 ‘헛됨’입니다.
새로움의 시작, 헛됨.
이들 스물여덟 때(카이로스)의 결론은 11절의 ‘영원’입니다. 전도서의 주제 ‘헛됨’은 영원성의 다른 말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헛됨’으로도 영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 전도서 신학입니다. 이 사람들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