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쌍의 ‘때’. 매년 성서일과의 송구영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도서 3장의 핵심 메시지는 ‘때’에 관한 것이다. 특별히 열네 쌍의 때(time)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열네 쌍의 ‘때’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체험을 중심으로 나열해보고자 한다.
가장 첫 번째인 ⑴ ‘날 때’와 ‘죽을 때’를 안 것은 내 나이 8세 때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때였다.
그 다음 쌍인 ⑵ ‘심을 때’와 ‘심은 것을 뽑을 때’는 내가 성실하게 섬기던 교회에서 나 스스로를 뽑은 때를 꼽을 수 있다. 단순히 뽑은 게 아니라 ‘심었다가 뽑은’ 타이밍에 관한 ‘때’이다.
⑶ 죽일 때와 치료할 때. 여기서 죽일 때(to kill)는 앞의 죽을 때(무트, to die)와는 다른 것이다. 누가 죽인 것인지 주어는 없지만, 분명히 단순히 죽기만(to die)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죽이는’(to kill) 때였고, 또한 누군가 ‘치료한다.’는 느낌도 들었던 때이다.
⑷ 헐 때와 세울 때. 나의 고대했던 어떤 것들이 수도 없이 헐렸지만, 이 작은 교회 미문(美門)이 세워졌다. 하지만 다시 헐릴 수 있다.
⑸ 울 때와 웃을 때, 그리고 ⑹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이 들쭉날쭉한 네 가지 느낌을 조울증이라 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한다. 과거에는 ‘때’로 이해된 것들이 심리학의 침공으로 조울증으로 전락했지만, ‘때’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울증인 이치이다.
⑺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 돌의 의미는 각자 다르겠지만, 돌은 어떤 일의 기초일 수도 있고, 그래서 돌은 어떤 서약, 맹약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버려진 약속을 다시 집어들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⑻ 안을 때(받아들일 때)와 안은 것을 멀리할 때. ‘나는 왜 저 사람과 멀어졌을까?’ 이제 우리는 ‘저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때’라고 말해야 한다.
그 외에 ⑼ 찾을 때와 잃을 때, ⑽ 지킬 때와 버릴 때도 있다. 아브라함처럼 백세에 겨우 얻은 아들을 바쳐야 할 때가 있다. 바치라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본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속성도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탐문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잃을 ‘때’란 그런 단계를 다 넘어선 ‘때’이다. 잃었을 때 가짜로 잃은 것이라 할 수 없다.
⑾ 찢을 때와 꿰맬 때. 찢어지면 새로 사도 될 일이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다. 새로 사서 구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꿰맸기 때문에 상처도 남지만 꿰매야 할 ‘때’가 있다.
⑿ 잠잠할 때와 말할 때. 나는 가급적이면 남들이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고는 남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매우 고된 일이다.
⒀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어제까지도 사랑했던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던 바로 그것을 또 사랑하게(또는 사랑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굴절에는 ‘때’가 끼어 있다.
⒁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 여기서 말하는 전쟁과 평화는 패자의 전쟁과 평화일 것이다. 승자가 기록하는 전쟁과 평화는 이런 식으로로 서술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족과 신앙이 궤멸당하고, 그러고도 남은(remnant) 모진 생명으로 포로기의 삶을 살아야 했을 때임이 확실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포로기로서의 ‘때’마저 다 저물어 가던 무렵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약 승자의 전쟁과 평화였다면 바드시 이들 모든 때에는 주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열네 쌍의 ‘때’에는 주어가 없는 바람에 악이 도래하게 되는 영향력일지도 모를 하나님을 바로 이 ‘때’가 대체한다.
두 종류의 ‘때’. 이들 열네 쌍 ‘때’의 시작을 거는 전도서 3장 1절(“하늘 아래 범사에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에서 앞의 때는 크로노스(Chronos)이다. 뒤의 때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다.
그렇지만 3장 1절 이후에 펼치는 열네 쌍의 때, 즉 스물여덟 개 때는 모두 카이로스일 뿐이다. 왜 카이로스뿐일까?
카이로스는 자상하지만 크로노스는 무자비할 따름이다. 죽을 때가 날 때를 집어 삼키고, 뽑을 때가 심을 때를 집어 삼키며, 치료할 때가 죽일 때를 집어 삼키며…, 그리고 세울 때가 헐 때를 집어 삼킬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평화가 그 전쟁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전쟁을 집어삼키는 것은 카이로스인 평화라기보다는 무자비한 크로노스이다. 전체의 때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자비한 크로노스의 중간을 카이로스의 순간으로 끊을 수는 있지만 무자비한 크로노스는 그 순간을 이내 잠식한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다시금 평화의 순간 카이로스를 몰고 온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제는 ‘헛됨’이다.
새로움의 시작, 헛됨. 이들 스물여덟 때(크로노스)의 결론은 11절의 ‘영원’이다. 전도서의 주제 ‘헛됨’은 영원성의 다른 말인 셈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