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대인에게는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최고 법정 제도가 있었다.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결정 기구이다. 산헤드린의 기원을 어느 때로 산정하느냐 의견이 분분하다. 바벨론 포로 귀한 시대에 에스라-느헤미야가 설치한 훈시 기구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스 10:8; 느 5:7), 아예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민·형사 소송을 홀로 처리할 수 없었던 모세가 70인 장로를 뽑아 분담했던 시절을 기원으로 잡는 경우도 있다(민 11:16, 17). 그러나 이스라엘이 제대로 된 주권을 가졌던 때는 사실상 거의 없었기에, 시대마다 교체되었던 주권 제국과 어느 정도 결탁된 관료 시스템이었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어 발음으로 쉬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이라 불렸던 이 유대인의 최고 법정 기구는 대제사장 1인 외에 70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왜 70인이었을까? 7은 음력 상으로 한 달의 4분의 1, 곧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이다. 이 7이 10곱이 되면 40수와는 또 다른 의미의 완전수가 된다. 이집트로 들어갔던 이스라엘 가족이 70명이었고, 바벨론 유배 기간도 70년이었으며, 예수의 파송 선교사 수 72명은 모세가 장로 70인을 세웠을 때 진영에 남아 있던 장로 2인을 합한 수이다. 심지어 히브리어 경전을 처음 그리스어로 번역할 당시 번역자 수도 70명(혹은 72인)이었다고 하는데, 70명을 70일 동안 각자 독방에 가두어 번역시켰더니 그 역본이 똑같더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그 완전성에 집착했다.
이런 신화적인 완전수들을 두고서 미신적인 집착을 보였던 이유는 단 하나, 신의 계시를 겸비한 그들의 법적 판단에 단 한 치의 착오도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합리성의 발로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집착이 실제 합리적인 정합성으로 전환된 때는 이 산헤드린이라는 법정 기구를 실제 운용할 때였다. 이들에게는 독특한 관례 하나가 있었는데, 만약 어떤 피고의 유/무죄를 가리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온 경우에는 그 결과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는 관행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결과를 아예 불법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그 피고를 풀어줬다고 한다(cf. Sanhedrin 17a; Maimonides, Hilkot Sanhedrin IX: 1).
왜일까? 70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똑같은 판정을 내렸다면, 설령 그것이 극히 초보적인 타당성의 판결이었더라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판결 기구의 정합성을 합리로 존치하겠다는 역설의 발로였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민재판으로는 흉악범 하나도 판결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표명인 셈이다. 이와 같은 규정은 70명 각자로 하여금 (이론적으로나마) 소신 있는 판결에 종사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69명이 가편 투표를 하는 가운데 자기 한 명이 부표를 던져도 탄핵 받지 않는다는 보장성 속에서 법관으로서의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기독교 성서는 예수의 일대기에서 이 쉬네드리온의 구성원 신분이면서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독특한 인물의 등장을 이야기 말미에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그는 예수가 쉬네드리온의 판결로 사형당한 뒤 그의 시신을 찾으러 온 유일한 제자였다. 우리는 이런 추론을 가할 수 있다. 아마도 산헤드린의 예수에 대한 유죄 판결은 70명 가운데 1인인 바로 이 한 사람 때문에 통과되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사실이다. 그가 만약 예수에 대하여 눈 한번 딱감고서 “죄가 있다”는 한 표만 행사하였더라도 (예수께서 사형당하지 않을) 부표 하나는 확실하게 담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0명 가운데서 “죄가 없다”고 할 사람은 거의 없다는 현실을 상정했을 때, “죄가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죄가 없다”고 하는 것보다 살릴 수 있는 확률은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죄가 없다!” 이것이 그의 법관으로서(제자로서가 아닌) 양심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진실의 부표가 예수를 죽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법리적 역설은 그로 하여금 유죄 판결을 받은 예수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찾아간 유일한 제자가 되는 용기를 주었다. 성경은 그런 그의 근성에 “당돌했다”(τολμάω)는 찬사를 보낸다. 이러한 추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8명이라는 다수의 대법관 가운데 지난 탄핵에서 어쩌면 단 하나의 부표도 나올 수 없었던가? 라는 합리적이고도 심리적인 의심에 근접했을 때, 결코 부당한 추론만은 아닐 것이다. 고대 사회보다 더 미개함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여세를 몰아 법관 탄핵의 제도를 통해 우리 사회 산헤드린의 정합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법에 대한 심판은 법이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학이라는 분야도 신학에서 유출된 학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그림: 요즘 김희선씨가 출연하는 ‘나인 룸’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요즘의 세태를 반영한 듯 법률이 갖는 제도적 오심(誤審)만을 부각하고 그 결정을 뒤집는 행위를 당연시/ 더 옳은 법 행위로 자극을 일삼는데, 그런 과정에서 마치 ‘ㅇ리법연구회’ 또는 ‘ㅁ변’ 단체를 연상시키는 알 수 없는 단체를 더 정의롭게 묘사하는 것은 법의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회적으로도 우려스러운 세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