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1세기경 로마의 관리 중에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약 4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다. 당시의 로마가 시내 관리를 위해 약 700명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다. 그런데 그 집에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침실에서 일하는 노예 중 한 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당시는 네로 치하였는데 개인적인 원한으로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노예들이 처형되어야만 했다. 그 400여 명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야만족이 아니었던 로마 시민에게 있어 그 같은 살육은 지나친 처벌임에 틀림이 없었다. 특히 귀족과 평민들 간에 이견이 팽배했던 모양이다. 평민들은 이 같은 처벌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로원의 공식 논의에서 처벌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무엇보다 네로의 군대가 개입해 형을 집행해버렸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노예의 목숨은 주인 손에 달려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제도의 근간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참한 여건 속에서 노를 젓는 갤리선의 노에나 채석장 노예들 보다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의 환경은 훨씬 안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했으며, 위반 시의 처벌은 엄중했다.
본론 | 자기 십자가
흔히 ‘자기 십자가’라고 하면 ‘가난’, ‘질병’ 등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불행을 이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실제 본문에서 자기 십자가를 언급한 문맥은 신앙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망대를 세우는 자와 막 전쟁에 나가려는 왕의 비유가 그것인데(눅 25:28-32), 망대를 세우는 사람은 기초만 닦아 놓고 그 비용 예산을 잘못 세워 미처 준공을 하지 못한 자이다. 또한 그 왕은 자기네 나라보다 두 배나 더 되는 병력을 보유한 왕을 치러 나가려는 무모한 자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그 크기와 무게에 부쳐 자기 신앙의 궁극적 실효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성서일과는 이 같은 자기 십자가 본문과 함께 빌레몬서를 한데 엮어 제시한다.
빌레몬서.
빌레몬서에 ‘자기 십자가’를 얹는다면 그 십자가는 누구의 것이 될까? 감옥 생활 하는 우리의 바울? 아니면 무서운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노예, 오네시모?
우리는 빌레몬서를 읽을 때 그 표제어로서 ‘빌레몬’은 언제나 무시하고 그 서신의 주된 활동 주체인 바울과 오네시모에게만 집중해온 일면이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주연이요, 오네시모는 조연이라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지나치게 당연시 하는 우리는 언제나 주인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놓임 받아 마땅한 인물로-, 주인 빌레몬은 마땅히 그를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인물로-,
심지어는 그를 놓아주라는 바울의 당부를 거역하기라도 하면 당장에 그를 지옥에라도 보낼 심산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빌레몬에게 너무나도 심한 요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페다니우스 세쿤두스에 다름 아니다. 오네시모를 죽여도 되는 지위와 권리는 어떤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엄한 사회법이다. 노예 해방 시대를 넘어온 우리에게는 페다니우스는 죽어 마땅한 <주인>이요, 오네시모는 해방됨이 마땅한 <노예>이지만 당시에 노예법은 결코 부덕이나 위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오네시모, 빌레몬 가운데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진 인물은 빌레몬인 셈이다.
우린 언제나 스스로를 바울 아니면 오네시모 역을 자처해왔다. 그러나 실상 우리 자신은 빌레몬으로서 ‘나의 오네시모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완성되는 것이다.
에필로그 | 나의 오네시모
나는 이 설교의 말미에 뜬금없이 다음 문맥을 읽어 주었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 때문에 분노한다.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고 싶어서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p. 134>
이것이 오늘날의 궁극적인 빌레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오네시모는 내가 분노하는, 내가 좀 더 사랑 받고 싶어했던,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바로 그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만큼 우리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해주면 된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 즉, 앙갚음을 끊는 길 아니겠는가.
* 2013년9월8일자 | 자기 십자가 | 눅 14:25-33; cf. 몬 1-21. (c.f. 렘 18:1-11; 시 139:1-6,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