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무관심
해럴드 라스웰(H. D. Lasswell)이라는 정치학자는 사람들의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 무정치적 태도, 정치의 가치를 인정치 않고 오히려 예술·과학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편이 정치의 그것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보이는 태도. (2) 탈정치적 태도, 자기의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크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과 영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환멸을 느껴 그 정치에서 탈퇴하는 태도. (3) 반정치적 태도, 어떤 종교적·도덕적·사상적인 입장에서 정치에 반대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입장으로서 도리어 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
그러나 우리나라 경우는 위와 같은 이론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운 ‘무관심’에 속할 것이다. 실상은 그 민족성 자체가 그 어느 민족 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응결된 상태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관심인 척 숨기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가는 사람을 잃게 되니깐?)
하지만 성서의 편찬 자체가 정치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 애가, 욥기, 열왕기, 역대기뿐 아니라 오경 전체, 그리고 마가, 누가.. 복음서들 외에 서신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정치 상황 아닌 문서는 없다. 다만, 그 편찬자들이 어떠 어떠한 정치색을 띠었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상황 배후의 하나님을 조명할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당과 지옥 얘기만 하는 목사라고 해서 신령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본론 | 예언자인가 정치가인가
(1)
다음은 예레미야가 활동하게 되기까지 배경이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는 B.C. 627년 경이다. 요시야 왕 제13년에 해당한다(렘 1:2). 그는 상류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곧바로 남 유다까지 압박해 오던 앗시리아가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그 위력이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이다(유다 왕 므낫세 시대).
그러나 앗수르의 힘이 급격히 떨어져 연합군이 되어 들이닥친 바벨론과 메대에게 니느웨를 내어줄 정도로 쇠퇴하게 된다(612년쯤). 이와 같은 세계국가의 패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틈타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은 내적으로 야웨 신앙 중심의 개혁을 가하고 밖으로는 북 이스라엘 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느고 II세에게 목숨을 잃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남 유다 왕으로 세워진다. (유대인들이 세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사로잡아가고 여호야김은 느고 II세가 세운 요시야의 다른 아들이다) 609년경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유다는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4년여가 지난 후 605년경 이집트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유다는 바벨론 지배체제로 바뀌는 신세가 된다(렘 46:2). 3년 정도 지나 남 유다는 일차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 왕 여호야긴과 지도층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대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앉혀놓는다. 597년경의 일이다.
약 601년 경 유다는 두 번째 반모를 꾀한다. 바벨론이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하자 예언자들의 예언 방향도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는데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여론이었다. 급기야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의 후원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집트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것과 같이해 이웃 국가와 동맹을 맺어 마침내 바벨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렘 27-28). 바벨론 군대는 589년경 다시 유다로 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587년경 유다는 완전히 망하고 시드기야는 눈알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2)
예레미야는 한 마디로 말해 당시 친 바벨론 정치 노선을 펼친 예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정치인이었다는 말도 아니고 그에게 특별히 정치적 취향이 남달랐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예언 사역이 전혀 시대를 외면하거나 소외 시키지 않고, 그 시대가 당면한 시대 속에 충실했음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인이라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을 갖는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관심’을 지향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가 관심해야 할 부분이 오직 영적 분별임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런 바른 (영적) 관심에 몰입해 있을 때에 외부에 비치는 우리는 때로는 ‘무관심’ 혹은 특정 ‘정파’로 비칠 뿐이라는 사실 또한 일러준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나 우리는 정치가 아닌 예언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필로그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그토록 유명한 말을 어쩌면 그렇게도 금은보화로 가득 채워준다는 말로만 알고 있었을까? 정말이지 청년기부터 접했던 목사님들께서는(특히 부흥강사님들) 한결 같이 내 입에는 재물이 채워질 것만 같이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문장 앞뒤를 조금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사실은 그 입에 찬양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 입에다가 ‘찬양’을 채우겠다는 말인 것이다.
집도 성전도 나라도 다 잃은 상태에서 누가 찬양을 하랴?! 찬양 부르라고 강제로 입을 벌리면 아마 인상쓰면서 다 자물통을 채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본말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상황인 셈이다.
* 2013.9.1일자 |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시 81:1, 10-16; cf. 렘 2:4-13. (c.f. 히 13:1-8, 15-16; 눅 14:1, 7-14.)
* 이미지 참조: sgilmore215.blogspot.com crustybread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