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EGO를 좀 먹는 영


  

자신의 EGO를 좀 먹는 영

일전에 소개했던(지난 2/25과 2012/07/02 )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GO는 ‘자부심/자존감’이라는 뜻에서 ‘자아’라는 심리적 의미까지 폭넓게 쓰입니다.
ECO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집’이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사실 ‘이기주의’(EGO)를 지양하고 조화로운 환경(ECO)을 지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서는 여전히 자아를 통해서 환경에 이르는 전통을 진리로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파워 블로거가 날이면 날마다 ‘신사참배’와 ‘독재’ 청산만 외쳐대는 걸 보고서 “그럼 다니엘과 예레미야도 친일파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네 친일파입니다.” 이 답을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호로 자식을 봤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그를 기억에서 꺼 버렸다.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 이런 어휘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민족이 지닌 기본 EGO의 혈액까지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드는 바람에 마치 내가 친일, 신사참배,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자처럼 만들어버리는 EGO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본다. (단 7:1-3, 15-18)

다니엘은 소년기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이 여러 차례 바뀌도록 압제자 나라의 중요 관직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다니엘서는 그의 꿈과 환상 그리고 그 해몽을 통해 그가 하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대 박수들과는 달리 정보를 활용할 줄 알았다. 오늘 날의 엘벤 토플러나 피터 드러커 정도 될까? 그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중심으로 수백 년의 세계 정치·경제·행정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주로 그가 섬긴 왕들과 정권의 카운슬링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자아를 통해 인식되고 나타났다. 즉, 다니엘은 자신의 자아(EGO)를 통해 세계(ECO)를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인자(人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아가 그를 통해 인식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아(EGO)를 통해 성령(ECO)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아로서 이 땅에서 충실한 자신의 생애를 사시고, 이어서 그의 제2 자아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포스트 보.혜.사. 즉, “또 다른 보혜사”란 그 뜻이다. 이미 자신의 EGO는 보혜사인 것이다. (둘째 아담, 다윗의 자손, 새 모세, 人子.., 다 그의 EGO에 관한 다른 말들이다.)

(3) 바울은 성령 받은 자아(EGO)를 통해 교회(ECO)를 설립해나갔다. (엡 1:11-23)

바울의 자아는 확실하게 성령 받은 사실을 인식한다. 성령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방언으로 아나? 통역과 예언으로 아나? 느낌(feeling)으로 아나? 무엇으로 그것을 아나? 교회라는 ECO를 통해서만 <성령 받은 나의 EGO>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박수나 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니엘처럼.

(4) 복과 화(ECO)는 자아(EGO)를 통해 임한다. (눅 6:20-26)

금주의 성서일과표(Lectionary) 마지막 성구는 두 개의 ECO(환경)을 제시한다. 복과 화. 전자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의 EGO를 지닌 사람들이 들어가고, 후자는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의 EGO가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친일, 신사참배, 독재, 이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김준곤의 CCC도 군사정권 부역의 산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의 동향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EGO를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지닌 EGO의 모든 혈액을 통째로 뽑아낼 기세로 달려들던 사람들이 금번 WCC에 가서는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면서 변증하는 모습을 보고서 뿜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비록 환관이었지만 – 그가 자신의 EGO를 살리려고 환관이 되었는지 민족의 EGO를 생존시키기 위해 환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자신의 후세들이 마음껏 배타적 제2성전 시대를 향유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은 자신의 꿈과 함께 그렇게 스러져 갔다.

훗날 이 배타적 제2 성전 시대 주도자들은 ‘사마리아’라고 하는 거대한 열등감을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끼리 칭찬하고 자기들끼리 칭찬 받는 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스도라는 종말은 바벨론이나 페르샤에 떨어진 게 아니라 사마리아 바로 옆 동네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열등감은 EGO의 아름다움을 좀먹는다.
허영은 EGO의 아름다움을 부패시킨다.

* 2013.11.3일자, 제목: 계시의 영을 주사 | 엡 1:11-23; 눅 6:20-26. (cf. 단 7:1-3, 15-18; 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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