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승천

엘리사가 벧엘을 지날 때 아이들이 놀리자 저주를 받아 곰에 찢겨 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선지자의 위엄’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구약시대의 의례적인 진노로 보아야 할까? 이 본문을 들어 현대식 목사가 자신의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한 넌센스다.

* 엘리야가 승천하기에 앞서 엘리사가 따르는 장면(왕하 2:1-2, 6-14)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을 따르는가 어떻게 따르는가

“따르라”(눅 9:59)고 했을 때, 따르는 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따르는 것 즉 따라붙는 것(tag along), 애착으로 따르는 것(be attached to), 목표를 따르는 것(go after),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obey), 행동으로 따르는 것(act on), 법률적으로 따르는 것(abide by/comply), 이들은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적시 적소에 사용될 때 온전한 ‘따르기’가 될 수 있는 요건들이라 하겠다.

본문에서 엘리야를 따라가는 엘리사 역시 위의 모든 요건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는데도 엘리사는 열심히 따라붙고 있다(tag along).
(2)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들의 제자들이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라고 만류 하는데도 “너희는 잠잠하라” 하고서 계속 따를 정도로 애착이 있다(be attached to).
(3) 또한 엘리야가 떠날 때뿐만 아니라 벧엘과 여리고를 지날 때에도 연속해서 “너는 여기에 머물라” 하는 데도 그 목표점을 놓지 않고 따른다(go after).
(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있게 해달라는)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obey)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다.
(5) 그렇게 엘리야가 승천하고 나자 그는 자기 옷은 둘로 찢어 버리고는 엘리야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들어 엘리야가 앞서 행했던 대로(act on) 물을 쳐서 가른다.
(6) 아울러 끝으로, 여리고에서는 ‘고치고’ 벧엘에서는 ‘저주를’ 한 일은 상당히 법정적인 것에 따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comply). 여리고는 증언을 했고 벧엘은 조롱을 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 예수님의 승천.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을을 저주하지 않으셨다. 저주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도리어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따르는’ 태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❶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는 집도, 굴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하셨다(58절).
❷ 예수께서는 죽은 자의 장사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60절).
❸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62절).

신약,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왔을 때 승천이라는 주제는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 줌(SHOW)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 속 승천을 어떻게 잘 승계하고 계승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9장은 그걸 강조하는 것이다.

2013년 6월 30일자 분, 본문, 왕하 2:1-2, 6-14; 눅 9:51-62. (c.f. 시 77:1-2, 11-20 갈 5: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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