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성서일과로 구성한 설교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 마다 다 다릅니다. 몇 가지가 다르지만 향유를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 것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뿐 입니다. 누가복음이 요한복음 보다 이 발에 붓는 장면에 더 주력합니다.
이 글과 설교 음원은 누가복음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프롤로그: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들
예수 그리스도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네 개의 복음서 강조점입니다. 우선 이 표를 살피면 이 사건에 대한 강조점을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은 왜 발에 부었는가?
성서일과가 3주째 엘리야 중심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이방 신 바알 사제와 대치하던 엘리야의 단호함이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바울 시점에 가서는 이방인의 복음을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단호함으로 뒤바뀐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천년 전에 대치하던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자리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은 하나님을 중심선상에 모셨을 때 우리의 ‘변화’ 혹은 ‘변질’이라는 태도가 그것을 갈라낸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엘리사-수넴 여인(왕하 4:8-37) 이야기와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엘리야-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복원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라는 대 선지자를 그 가정이 만났던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 변하고 사라져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과 관계된 이야기에 들어섬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3주째 성서일과에 거듭되는 엘리야. 왜 엘리야인가?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던 2인 중 한 사람도 엘리야. 모세는 ‘모세’니까 그렇다 쳐도 많고 많은 예언자 중 왜 하필 엘리야였던가?) 그것은 그가 ‘최고의’ 예언자라서가 아니라 ‘최초의’(The First) 대(大)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저자 누가가 특별히 그곳을 나인 성이라고 밝힌 것은 엘리사를 회고하는 듯 보이지만(그곳이 수넴과 가깝기에), 궁극적으로는 엘리야를 겨냥합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주듯 “돌려준다”고 회고 했습니다[눅 7:15].) 즉, 그 분은 바로 ‘대 예언자’라는 것입니다(7:16).
오늘 본문 역시 한 여인이 그리스도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를 통해 ‘대 예언자’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합니다. 마가복음(14:3-9)을 참조하고 있는 마태는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를 베다니의 나병환자 집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한 바리새인의 집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 향유 붓는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도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 혹은 ‘어떤 사람’인 반면 누가복음은 그 집 주인(바리새인)으로서 시몬입니다(다른 복음서는 나병환자인 시몬). 같은 사건도 저자마다 약간씩 편차있게 기록하게 마련이지만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처럼 그리스도를 ‘대 예언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인 성 과부 이야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떻게 대 예언자 상을 보여주셨는가를 기록했다면, 오늘 본문인 향유를 붓는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는 어떻게 이 마지막(The Last) 대 예언자를 ‘대접’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1) 그 발 곁에 서다.
(2) 눈물로 그 발을 적시다. /머리털로 닦다.
(3)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다.
에필로그 | 그리스도에게 기름 붓는 자의 자격
유대인에게 손과 발을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식입니다. 식사 교제 특히 잔치의 경우 그러한 의식으로 환대가 표명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밥을 함께 먹을 수 없는 부류들과의 선을 긋는 것 또한 씻는 행위였습니다. 즉 환대의 표시이자 결별의 표시인 셈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발에 향유 부은 여인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죄 지은 여자’로 지목하고, 또 비난하는 자 역시 “선지자라면서 죄 지은 여자가 자신을 만지게 두었다”라며 비난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은 자의 정체성 내지는 자격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대 예언자나 군주들이 하는 식으로 유력한 인물에게서 기름부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죄인에게 기름부음 받는 분이시라는 역설인 것입니다. 게다가 기름부음은 머리에 받게 마련인데 발에 부어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역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 기름부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죄인’뿐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겠습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닌 자는 이 특권을 누릴 길이 없습니다.
성서일과, 왕상 21:1-10, (11-14), 15-21a; 시 5:1-8; 갈 2:15-21; 눅 7:36-8:3.(2013-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