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NCD Vs. Finding Organic Church.
과거 NCD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 과거만 못하기에.)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만든 이말을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이란 이름으로 들여왔다. 마이너스 성장하는 당시 개신교 환경 속에서도 신흥 메가쳐취의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그 열풍이 지방 중소형 교회에 한창 일 무렵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사람이 쓴 책 하나가 Finding Organic Church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 때 아마존 베스트셀러 12위에 랭크 된 이 책의 제목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NCD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1) Natural, Organic, (2) Development, Finding, (3) Church, Church. 세 쌍의 시니피앙도 같고 의미도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교회의 구태 패러다임을 파격적으로 탈피시키겠다는 케치프레이즈도 같다.
NCD의 경우는 자연적 성장의 특질을 ‘지도력’, ‘사역’, ‘영성’, ‘교회조직’, ‘예배’, ‘소그룹 활용’, ‘전도’, ‘인간관계’ 8분야로 특징 짓되, 특히 소그룹의 활용과 효과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NCD도 이 과정에서 초대교회처럼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바이올라의 책도 초대교회 같은 작은 교회를 지향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메가쳐치에 효험이 있고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Development를 Finding 곧 ‘확립’, ‘발견’으로 번역하지를 않고 단지 ‘성장’이라고 오역하는 바람에 초래된 결과 같다. 한편, Finding Organic Church는 자연적 교회(Organic Church)에 반하는 그 특질을 다음 8가지로 규정한다.
The glorified bible study(미화된 성경공부),
The special interest group(특별 이익집단 모임),
The institutional home church(제도화 된 가정교회),
The personality cult(개인 숭배),
The bless-me club(자기 수집품적 모임),
The socially amorphous party(사회적으로 모호한 집단),
The disgruntled malcontent society(불만에 찬 불평분자 집단),
The unwritten liturgy driven church(비성서적 예배가 이끄는 교회)
The special interest group(특별 이익집단 모임),
The institutional home church(제도화 된 가정교회),
The personality cult(개인 숭배),
The bless-me club(자기 수집품적 모임),
The socially amorphous party(사회적으로 모호한 집단),
The disgruntled malcontent society(불만에 찬 불평분자 집단),
The unwritten liturgy driven church(비성서적 예배가 이끄는 교회)
프린서플 | 다른 복음은 어떻게 식별되는가.
우리 나라 경제성장에 발맞춰 급성장한 기독교가 지나치게 귀족화되고 세속화되자 여기서 낙오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틈타 시한부종말론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가 1992년이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이 휴거소동이 해프닝으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종말론이나 은사주의는 당분간 소강 상태인 채 물러난다. 대신에 기독교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와의 문화적 소통에 상대적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열린예배 형식이 모색되고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문화엔진을 장착한 강력한 패러다임 틀이 교회로 유입된다. 때를 같이해 2000년대 초 서구의 다채로운 성장 모델이 수입되면서 과거 국가 성장기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적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된다. Cell, 목장, 소그룹운동, 총동원…이런 용어들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목격되며 NCD라는 이름도 이때 접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아랍권 체제의 붕괴, 기아, 천재지변, 그로인한 원전폭발 재앙…,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세계를 덮치고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기독교는 지엽적 이데올로기형 종교, 웰빙·웰다잉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입은 종말론과 은사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참되려면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상황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왕상 18장). 바울은 본문에서(갈 1:1-12) 다음과 같이 그 식별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저마다 “사람 뜻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 분별이 어려운 것같지만 바울처럼 자기 됨이 어디까지나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즉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확실성이 있으면 구별할 수 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당시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 그 복음은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전통에 의거 할례까지 추가로 받아야 완성된 믿음이라고 가르치던 그 복음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왕상 18;20-21) 당시 훼파 대상이었던 그 편에 바울이 위치 되고 마는 셈이고 (왜? 바울의 복음은 이방인의 복음이니까)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진노했던 그들이 도리어 과거 엘리야 편에 서 있던 전통 이스라엘이 된 상황이다.
이같은 다름(difference)의 발생을 어떻게 오늘날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다름이라면 오늘날 동성애도 WCC도 자연스레 허용해야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의 지연과 거기서 오는 차이(difference)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복음이 엘리야의 자리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의 다름은 <변화>였고, 전통의 자리에 섰던 그들의 다름은 <변질>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할례라는 전통을 차별의 용도로 전락시켰으니까.)
포스트 모더니즘 즉, 해체의 시대에 다름(difference)은 늘어지거나 지연될(différer) 때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제아무리 자신이 달라지지 않았다 주장하더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말이다. 달라지지 않은 자가 있던가? 새삼 “자연적”, “유기적”이란 말은 해체의 다른 말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어떻게 달라지느냐인 것이다. 변화인가 변질인가.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에도 변치 않는 게 있기는 하다. 에크리튀르, 즉 ‘흔적’이나 ‘자국’은 남게 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서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직접 계시라는 말인데 ‘다른’ 직접계시와는 또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바울, 그의 생애로 보나 문법적으로 보나 그 계시는 한 마디로 ‘변화’를 말한다. 변화가 계시이다. 그렇기에 바울의 계시로서 그의 변화는 오랜 기간 집중받아 온 것이다.
에필로그 | 집합을 위한 분할인가 집단을 위한 분할인가.
자연적 교회(Natural Church)와 유기적 교회(Organic Church)는 둘 모두 초대교회를 표방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 ‘분할된 것’을 지향하는 면에서도 같다. 그래서 ‘흩어지고,’ ‘모이는’ 교회로서 유연성도 같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분할이 꾀하는 ‘전체’ 내지는 ‘집합’에 관한 문제가 둘을 가른다. 그 분할이 1인을 위한 집단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분할된 1인들이 집합 자신으로 존재하는 지의 문제는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사제를 맞닥뜨린 현장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지 참조:
www.ely.anglican.org
dallasnaz.comjoinedtoh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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