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관련 강의를 하면서 <레 미제라블>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보았다. 강의 내용상 <혁명>을 주제로 엮어 쓴 논평 하나와, <법치>라는 주제에 끌어다 쓴 논평 하나, 이렇게 상반된 두 입장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 이야기를 변증법 예제로 활용했다.
경향신문이 전자 관점에서 시대 배경과 함께 평론 하나를 내놓은 적 있고, 조선일보가 “장발장은 100% 희생자인가?”라는 제하에 마치 전자를 견제라도 하듯 장발장의 19년형에 대한 적법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121017581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8/2013011802332.html
경향신문은 <혁명>을 유독 당시의 ‘최저임금제’ 관련 소요와 부각시켜 국내 현실을 연상케 했는가 하면, <법치>의 타당성을 피 력하는 조선일보 역시 노동계의 장기 농성 사태 몇과 연결지어 논평했다. 경향신문은 성실한 논리로 썼지만 조선일보는 천박한 논조로 썼다. <법치>의 타당성을 피력해보려 한 것같은데 레 미제라블의 막대한 중량감을 몇 자의 말장난으로 넘어보려는 시도가 더욱 천박하게 되고만 사례다. 기자의 직급도 더 높은 것같은데 그렇게 써놓았다.
이미 경전과도 같은 지위에 오른 문학작품을 문학 자체로 읽지는 못하고 언제나 이런 조악한 시류로 끌어다 윤색들을 하니, 과거 무식한 편집자들에 의해 자베르를 테나르디에 따위 악당과 한 대열로 읽게 만들었던 선례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그런 역사에 대한 이해관계의 편차가 모순을 합법화 했고, 그것이 소위 변증법의 정당성이 된 뒤에는 유물론에게도 길을 내준 것 아니겠는가.
레 미제라블은 결코 혁명에 종사하지 않는다. 자유에 종사한다. 레 미제라블은 결코 법치에 종사하지 않는다. 법의 붕괴와 종말 에 종사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신의 부재에 대한 해명에 종사한다. “고개숙여!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개 숙여! 무심한 예수여!”로 시작을 고했다가 마지막에 신의 존재로 마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혁명 주체는 “우리는 왕을 죽였다-”라는 노래로, 팡띤과 에포닌 은 “그 남자가 제발 내 곁에-”라는 노래로, 자베르는 “정의로 악 을 제거하리라-”는 노래로 각자의 테제를 형성하지만, 오로지 장 발장의 테제만이 그 모든 반-테제를 극복하고 살아남는다.
특별히 법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자베르와의 대결은 단지 (빵을 훔친 절도로 19년형이라는) 법의 과잉을 처단하려는 시도 정도 가 아니라, 아예 법이 갖는 직능 자체에 도전하기에 문 밖에서 벌어지는 혁명보다 더 도발적이다.
자베르는 장 발장과 같은 자아를 지녔다. 장 발장이 빵 한 조각 훔친 것으로 19년형을 살았다면 자베르는 아예 감옥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원작에서 어머니는 집시 점쟁이였는데 갤리선 노예와의 사이에서 임신했다.
이 둘은 ‘어둠’은 공유하지만 ‘빛’은 공유할 수 없다. 장 발장의 빛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자베르의 빛은 자신이 축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 발장은 타인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타인을 향해 열려 있지만 자베르의 빛은 자신만을 향해 겨누고 있다.
장 발장의 은혜에 감염된 자신을 주체 못하는 자베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법의 종말이 갖는 형식이며 그리스도에게 그 법의 권능이 이양되는 형식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것은 정반합으로 도출될 수 있는 형식이 아니므로 헤 겔의 합리적 신(神)의 종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들 (레 미제라블)의 혁명을 등에업고 혁명 마케팅을 펼치는 자들 이 자본과 경제의 이름으로 유물론을,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진화론을 향해 치닫는 역사를 가져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 발장의 이 막대한 에너지가 어째서 팡띤과 코제트라는 소수에게만 집중될까 하는 의아함을 가졌었다. 그때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서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어린 가브로쉬의 순수한 혁명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다수(多數)에 매몰된 혁명은 대개 그 역시 자본에 물든 경우가 많다. 단수(單數)로 된 소자에게 성실함으로 우리는 거짓 혁명으로부터 진정한 혁명을 복원시킬 수 있다. 그것이 가브로쉬의 훈장이다.
원작에서 밀리에르 사제가 등장하는 테마에 입혀진 표제가 있다. 바로 <일하는 사제>라는 표제다.
이것은 실로 마태복음의 계시록인 25장 31-46절의 표제와 맞먹는 표제가 아닐 수 없다. 다수에게 종사하는 사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일하지 않는 사제라는 역설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Google 검색 키워드에 감독 톰 후퍼의 종교를 검색하 는 검색어가 등재될 정도로 금번 영화는 종교적 텍스트가 많은 데 그것은 그의 종교와 상관없이 그의 버전이 원작에 가장 충실하게 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