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이 글은 미합중국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성공함에 따라 거기서 사용된 법리와 판례가 이제 전 세계 동성애 합법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 자명한 시점에서, 단지 그들을 기이한(queer) 어떤 것으로만 일관하던 기독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될 지에 대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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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and Jonathan” by Ryan Grant Long

나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카이스트의 한 교수가 자기 홈페이지에 노골적인 안티-크리스천 운동을 펼치면서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였다’는 장문의 아티클을 영어로 적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 아래와 같은 장문의 글을 반론으로 남겼다. 당시에는 체계적으로 뭔가를 배우기도 전인지라 역사적 개론도 없었고, 편집 비평 따위의 어떤 기술도 갖추지를 못해 지금 다시 읽으려니 입가에 웃음이 맺히지만, 지식보다는 성령님만 믿고 있던 나를 보려니 마치 무턱대고 덤비는 다윗이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변호하고 싶은 강렬한 열정으로 차고 넘쳤다.

바로 이 글이다.

(다소 길므로 지루할 분은 건너 띄어도 좋다. 문맥에 큰 지장은 없으므로.)

성경은 인간에 의해 계획된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경륜 아래 단지 인간어로 편집된 그분의 말씀입니다. 세상 여느 문서 같이 한사람이나 한 집단이 일관성 있게 기록하여 전체를 그럴싸하게 꾸몄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성경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완전히 다른 사건과 경우를 배경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의 다른 문체와 형식을 빌려 작성된, 그야말로 한 권으로 문집 된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경이로운 책인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같은 사건 같은 경우가 등장인물만 바뀌어 나오는 것도 같고, 혹은 동일 인물에 대해 묘사한 글인데도 앞뒤가 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야말로 취약하기 그지없지만, 어떠한 가감도 없는 이런 미숙한 편집이야말로 신뢰를 더해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으니, 바로 그 ‘편집의 내츄럴’(부자연스러움)입니다.

글을 썼던 여러 사람이, 게다가 서로를 모르는 여러 사람이, 존재하던 시간도 다르고 공간도 달랐으면서 세부 묘사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뜻은 다 똑같아! 신기하지 않은가?! 말입니다.

사무엘 상권과 하권이 바로 그런 문헌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수금 타는 직무로 출근 하다가(삼상 16:23) 골리앗과 싸운 시기는 분명 소년 시절인 것처럼 보이는데 금세 군대의 높은 직급이 되고, 또 왕의 수금 타는 일을 했다면 왕이 그를 모를 리 없을 텐데 골리앗과 싸워 이긴 후에 “제가 누구냐, 누구네 집 애냐?”라고 부르기도 하고(삼상 17:55). 게다가 싸움에서 이긴 직후 왕 앞에 섰을 때는 웬 난데없는 요나단과 마음이 교통?

자,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안티 크리스천들이나 동성애자들이 꼭 붙잡고 싶어 하는 부분이 바로 요 부분입니다. 우선 성경 본문을 보겠습니다.

“After David had finished talking with Saul,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and he loved him as himself.”(1 Sam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다시 말하면, “요나단은 영적으로 다윗과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요나단이) 자기 자신처럼 (다윗을)사랑했다”라고 되어 있으니… 동성애자가 좋아할 만 한 구절이죠.

현대어 성경들은 대개 말을 순화 시킨다는 것이 그만 저렇게 모호하게 축약되고 말았는데 KJV는 비교적 뜻을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the soul of Jonathan was knit with the soul of David, and Jonathan” 즉 “요다단의 (영)혼과 다윗의 (영)혼이 knit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너무도 중요한 키워드가 하나 발견 됩니다. 바로 knit입니다. 한글개역에서 ‘연락(聯絡)’이라고 번역했던 ‘was knit’.

구약에서 약 44번이 나오는 이 단어는 bind together(함께 묶였다)입니다. 이 용례를 몇 가지 알아보면,

우선 창세기 44장 30절에서 애굽의 총리 요셉이 베냐민을 붙잡아 두려고 하자 유다가 나서서 말하는 대목입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창 44:30)

연락(was knit)과 결탁(is bound up)은 분명 다른 어휘지만 히브리어로는 둘 다 ‘카-솨ㄹ’입니다.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15:31)

압살롬의 쿠테타에 아히도멜이 포함되어 있다고 다윗에게 고하는 장면입니다. 처음에 나왔던 ‘was knit’ 가 이번엔 ‘is among the conspirators’(모반한 자들 가운데)라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동일한 단어 ‘카-솨ㄹ’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8)

정리해보면 요나단과 다윗이 특별한 감정으로 연락(聯絡)된 것 같은 뉘앙스로 오해한 이 ‘카-솨ㄹ’는 나이 많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엮인 마음과 함께 주로는 동맹적인 마음의 결탁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전혀 성적인 심정의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어린 베냐민을 향한 늙은 야곱의 강한 연정의 결탁’이나 ‘쿠테타 일으키는 사람들의 결연한 동맹’ 처럼 어떤 강한 결속력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동성애자들이 다윗과 요나단에 관해 붙잡는 구절 하나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바로, 다윗의 시(詩) 부분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자, 요렇게 떼어놓고 보니까 어떠세요? 진짜, 심각하죠? ^^

다윗은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하나님께 시와 찬양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시(詩)가 무엇인지는 굳이 그 장르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詩는 詩로 읽어줘야 합니다. 그것을 단어와 단어, 주어와 동사를 따져가면서, 이러 이러하니 이런 게 아니냐는 식의 관찰을 하려드는 것은 참으로 딱한 것이지요. 그래도 문제를 제기 하니 한번 따져보도록 하죠.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시어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데 평소에 그가 사용하는 부드럽고도 강한 필체를 감안하면 사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내용입니다. 다만, 개역성경의 번역에 있어서 ‘기이하다’는 부분이 조금 모호한데 그것은 ‘이상스럽다’는 뜻의 ‘기이함’이 아니라, 놀랍다, 경이롭다(wonderful)는 뜻의 옛 구어일 뿐, 예수님을 ‘기묘자’(Wonderful; 사 9:6)로 표현한 경우가 ‘Wonderful’의 마땅한 한글 명사형이 없어서 중국식 한자 용어를 골라 쓴 말인 것처럼 여기서도 한자식 표현에 너무 집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이런 말을 안 쓰지요.

그리고 또한 pleasant는 ‘아름아움’이 아니라, 기쁜/유쾌한 등의 뜻으로 바꿔야 더 정확할 것 같구요. 내가 만약 다시 번역한다면,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기쁨이었고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경이로워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사역)

그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다는 사실 때문에 ‘기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은 경이로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여인들의 이성의 사랑보다도 ‘더 초월적이다’라는 뜻인 거지요. 다른 시편의 詩들과 마찬가지로 그 영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습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여성으로부터 받는 사랑보다 더 초월적인 게 뭐가 있습니까?

자, 이로써 그들의 우정이 어떤 종류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본 것은 ‘동성애’가 아닌 ‘동지애’(was knit; [kaw-shar])였던 것입니다.

작성일자 2003.5.12

JonDavid

http://www.gaychristian101.com/Jonathan-And-David.html

윗 글을 쓴 지 12년 즉, 열두 해가 지난 지금 공교롭게도 지난 주간 성서일과에서는 다윗이 사울-요나단 부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이 포함 돼 있다. (삼하 1:1, 17~27)

뿐만 아니라, 나로서는 실로 공교로운 사실인데..,

그 성서일과 중에는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대고서는 낫는 이야기와, 열두 살 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나는 이야기도 나온다. (마가복음 5:21~43)

혈루증이란 여성이 하혈을 하는 병을 말한다. 하혈하여 생산이 불가능한 여자의 투병 기간이자 죽은 딸의 나이이기도 한 열두 해 즉 완전수가 상징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완전수의 정지, 병들어 생산을 멈춘 그들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할 것이다. 마치 이 시대의 기독교처럼.

이 신약의 본문과 함께 사울-요나단의 죽음 본문이 묶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의인 다윗은 바로 나’라는 감정 이입에 몰입한 나머지 ‘사울이 마침내 (잘) 죽었노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혈루증으로 단산한 여인의 몸과 같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참상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혈루증 걸린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새로움’이었다. 새로움.

다윗은 (사울보다 나은) 왕으로서 간택된 인물이기에 앞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제도를 상징한다.
왕의 제도의 한계로부터 새로운 제도를 창설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점에서 우리는 대체 다윗의 무엇이 새로움이었을까,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금번 동성결혼 합법화로 미국이 표지한 바는 전 세계 하나님의 나라가 직면한 참상이 마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스라엘의 참상과 같기 때문이다.

4.2.3

http://www.womeninthebible.net/Menstruating_woman_her_world.htm

그 혈루를 말려버린 새로움이란 바로 다윗이 구현했던 ‘찬양’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왕의 제도’를 능가하는 새로운 제도였던 것이다.

우리 역시 어려운 시대에 직면해 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한마디로 ‘사랑과 증오’의 죽음이었다.
미국이 그렇게 죽은 듯 하다.

미국이 죽으면서 뿌려놓은 혈루는 동성애라는 성(sexuality)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정(home)의 문제였다.
가정이 끊긴 틈 사이로 동성애가 흘러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판결 요지를 다시 옮긴다.)

1) 결혼제도는 과거와 달리 많이 붕괴되었다,
2) 동성부부가 어떤 면에선 오히려 그 제도에 더 순응한다,
3) 게다가 그들은 그동안 박해까지 받아왔다. (그것이 미합중국의 ‘체험’이 되었다)
4) 따라서 결혼제도를 불허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지고 말았다.

단언컨대 동성애를 기이한(queer) 성으로 간주하는 박해를 통해서는 더이상 기독교에 승산이 없다.

동성애자들이 ‘행복한 가정’을 희구함으로 그 제도를 찬탈해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비하면,
‘건강한 교회 행복한 가정’이라는 현대교회에 만연한 이 표어는 사실, 혈루증 걸린 여인이 열두 해 동안 의원들에게 돈이나 허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부도덕한 교회 자신을 감추는 표어로 허비되어 온 게 사실이다.

우리는 의원들에게 꼬박 12년을 돈이나 허비하다가 단산에 이르고 만 것이다. 겨우 얻은 12살 된 딸은 죽고.

우리는 동성애가 만연했던 로마시대에 우리의 선배인 초대교회가 ㅡ 특히 바울 ㅡ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성애가 만연했던 시대에 자연히 돋보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법 즉 자연법의 순리에 결연히 따르는 것이었다.

법의 기원은 두 가지로 가를 수 있다. 하나는 자연법, 두 번째는 그 자연을 두려워하는 기제가 형성해낸 터부(taboo). 프로이트가 종교와 법의 기원으로 포착한 것은 아마 후자일 것이다. (후자에 기원한 법은 그래서 동성애나 근친상간과 같은 터부 자신에게 늘상 새로운 법을 통해 도전을 일삼는다.) 그러나 법의 기원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어떤 터부(taboo)의 기제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에 기인한다. 터부에 기제된 모든 법은 합의가 달라질 때 모두 사멸하는 것들이다. 창조 즉 자연의 순리에 따른 것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가 시작하는 제 1테제가 되었다.)
그것에 우리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윤리라고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그 똑똑한 카이스트 교수에게 자극을 받고서 저렇게 귀여운 장문의 글을 남긴지 꼭 열두 해/1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 나은 논법으로 금번 법리에 대항할 만한 논리를 제시할 법도 하지만 혈루증은 논법이나 논리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압도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놓고서 가정을 파괴했던 교회 자신들의 행위부터 회개하자.

* 2015년 6월 28일 성령강림 후 제 5주차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성서일과, 막 5:21~43. (cf. 삼하 1:1, 17~27; 시편 130; 고후 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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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도상해석학과 신학의 지평융합: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Post Secular 새교회 새목회 (2013). | Fb/@pentalogia Twtr/@pentalogia | You can add my to your circles. 로 연결해 보세요.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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