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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보인 일곱 표적[*] 가운데 종결편이다. 흔히 이후에 일어날 (진짜) 부활의 예표이거나 그림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표적’으로 – 요나의 표적을 빗대면서 –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목하는 것과는 달리, ‘나사로의 부활’을 명백한 최종 표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것이다.)

게다가,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나 다시 살아나겠죠…” 라며 부활의 현재성을 부정하는 마르다(Martha)의 부활 이해를 교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부활의 현재성’에 종사한다.

‘부활의 현재성,’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인의 썩은 시체를 다 살려내야 한다는 건가?

그런 것도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니…”(25b-26a절)

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대개 ‘죽은 사람은 벌떡 일어나고, 산 사람은 불로장생 한다’라는 뜻으로만 읽으나, 그것은 산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었다 살아나는’(부활) 경험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10)는 표현과 일반인 상태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는 ‘죽었다 살아남’의 체험이 단지 어떤 래토릭(rhetoric)이 아니라 정말 죽었다 살아나는 정도의 체험이더라는 실제 경험을 지닌 자만이 이 부활의 현재성을 지녔고 또 이해도 할 것이다.

우리는 부활체는 아니지만 현재적 부활체로 살아간다.
나사로가 부활체는 아니지만 현재적 부활체로 수명을 다 산 것처럼.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손바닥 혹은 옆구리 상처에 손 넣고 찔러 보는 이 요한복음서의 행위는 영지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실은 지극히 실존적인 현재성에 종사하는 풍경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술어인 바 일종의 스티그마와 같은 것이다.
[*] 참고: 그리스도의 일곱 표적,
(1) 가나의 혼인 잔치/ 요 2:1-12: 물을 피로 변화 시켰던 사건이(출 7:14‐24) 포도의 피인(blood of grape, 참조. 신 32:14) 포도주를 물로 만드는 이적으로 비교되고,
(2) 백부장의 아들/종을 고침/ 요 4:46‐54: ‘아들’이라고 쓰인 단어가 종을 지칭하는 어휘이고, 종은 어떤 소유 개념으로 볼 때 생축 재앙(출 9:1‐7)과 비교되며, (참고, 마 8:5‐13; 눅 7:1‐10에서 각각 종 또는 아들로 표기됨)
(3) 38년 된 병자 신유/ 요 5:2‐9: 독종 재앙(출 9:8‐12)에 대응된다.
(4) 갈릴리 바다의 풍랑 이적/ 요 6:16‐21: 뇌성과 우박 재앙(출 9:13‐35)에 대응된 이적이며,
(5) 급식 이적(오병이어)/ 요 6:1‐15: 메뚜기 재앙(출 10:1‐20)에 반대되는 것이고,
(6) 실로암 맹인 고치심/ 9:1‐41: 흑암 재앙(출 10:21‐29)에 대응되며,
끝으로 (7) 나사로 소생/ 요 11:1‐44: 출애굽 당시 열 표적 중 마지막 이적인 애굽의 장자를 치는 재앙(출 11:1‐12:30)에 대응된다.

* 2014.4.6. 사순절 제5주/ 보라색
* 요 11:1-42; 롬 8:6-11.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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