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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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

호모보누스와 프란치스코.

1197년 경에 활동하던 호모보누스라는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번창시켜 사업에서 버는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 제공했다. 그런 까닭에 가족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교회에 나가는 등 신실한 생활을 하였다. 호모보누스라는 이름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그는 죽음도 미사를 드리던 중 맞이했다. 사후 이노센트 III세에 의해 성인에 올려진 그는 사업하는 자의 귀감이며 그래서 그의 심볼은 ‘전대’다. 비슷한 시기 1182년 경 같은 이탈리아 아씨시라는 지역의 프란치스코도 역시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교역을 하러 갔다가 그를 낳았는데 프랑스와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도 “프랑스 인”(프란치스코)이라 지었다. 그는 원래 기사가 되려고 했으나 젊은 날 배회를 했던 것같다. 어떤 이름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곤 하다가 하루는 한센 병 환자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그가 가서 돈을 쥐어 주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깊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아씨시 부근의 한 교회를 지키는 가난하고 늙은 신부를 보고서 아버지 가게에 있는 값비싼 포목이며 말이며 다 내다 팔아 그 신부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행에 보다 못한 아버지는 일부 재산을 물려준 상속권을 회수하기 위해 법정에 세우기까지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상속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그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이후 그는 저 유명한 극단적 청빈의 수도회 프란체스코회의 설립자가 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전대.

모든 사람이 극단적인 청빈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사람이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프란치스코와 같이 예수님의 길을 좇아 극단적인 실천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건강한 경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큰 기둥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본문에서 주님이 칠십 인을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단지 칠십 인(seventy)이지 제자라는 명칭이 없다. 열둘을 세우고 있는 마태복음 보다 훨씬 보편화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꾼이 부족하다. 이 보편적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대,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며

먼 여행을 갈 때는 배낭은 물론 어느 정도의 여비도 소지하고 떠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모든 것을 금하시고 신발도 갖고 가지 말라 하신다. 이는 무소유의 청빈을 어떤 미덕으로 설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대나 배낭이 필요 없는 복음 사역의 정석을 이르는 말씀이다. 먹을 것은 유숙하는 집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먹고, 배낭에 무엇을 받아 넣을 일도 없는 것이다. 걸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꾼’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마땅히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일꾼이라는 전제일 때 가능하다.

(2) 영접하지 아니하면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불친절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복음이 갖는 가치를 이르는 말이다.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든 구차해져서는 안 된다.

(3)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본문은 집에서 집이 아닌 집에서 동네로 이동할 것을 권고한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공동번역)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1) 복음을 통해 뭔가를 사고 담으려는 것에 대한 경계, (2) 복음은 구원의 도구이지만 심판의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 끝으로 (3)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태도에 대한 경계를 들 수 있다.

에필로그 | 프란치스코와 걸식 수도사들

프란치스코가 추구했던 것처럼 청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요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행처럼 번져 걸식이 마치 무슨 트렌드처럼 된 때도 있었다.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본문 가운데 해독하기 가장 어려운 말씀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보를 통해 엘리야와 엘리사를 읽던 누가의 게하시에 대한 경계이다. 가정 방문과 공적 장소를 제외한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사제의 속셈은 무엇인가?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는 병 나아 돌아가는 나아만을 쫓아가 돈을 받아냈다.
이것이 곧 “전대나 배낭을 휴대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전대나 배낭에 돈이나 물건을 넣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빈 가방(혹은 지갑)을 들고 가는 목적은 단 하나 거기다가 뭘 담아가지고 오려는 심산일 경우이다. 그것이 실제 지갑이든, 마음의 지갑이든. 본문은 이런 걸식을 경계한다.

* 성서일과, 눅 10:1-11, 16-20 (c.f. 왕하 5:1-14; 시 30; 갈 6:(1-6),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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