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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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프롤로그 | 소망 Vs. 희망.

소망(所望)과 희망(希望)은 다른 말일까? 국내 개신교에서는 희망이라는 말 보다는 소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공동체에서의 사용 빈도수도 그렇지만 성서번역에도 그러하다. 신약성서 기준으로 개역한글에서 48회 정도가 소망으로 번역되는 동안 희망은 단 한 번 쓰였고, 표준새번역에서는 소망이 45회 희망이 13회 채택되었다. 그리고 새번역의 소망은 45회이고 희망은 14회다. 공동번역만이 59회 모두 희망이라고 번역했고 소망은 단 한 건도 채택하지 않았다. (개역개정은 개역한글과 같다.) 
참고로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들을 도왔던 래지스탕스 출신 자끄엘륄은 소망과 희망을 구분해서 쓰는 학자다. 에스뻬랑스(espérance)와 에스쁘아(espoir)가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에 espérance를, 그리고 무의미한 현대인들의 기대를 espoir로 구별하는데, 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관련 학회는 역시 긍정적 전자의 기대감을 ‘소망’으로, 후자는 ‘희망’으로 구별해 번역한 듯하다(c.f. 한국자끄엘륄협회 주).
아마도 그것은 한자로만 볼 때 앞의 ‘소(망)’는 공간적 목표점을 가르키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희(망)’는 공간적 지형을 배제한 유토피아 뉘앙스가 강한 낱말로 판단해서인 것같다. 그러나 유토피아 utopia는 분명 “장소”(τοπος)라는 말에 “없다(ου)”라는 부정 접두가 붙은 말로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뜻하기에 “도달할 수 없는” 허구를 가르키는 현대적 허구와 부합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로 반영될 때 기대에 대한 강도는 전자보다 더 증가될 수 있다 하겠다. 즉 에스빼랑스가 되는 셈이다.

프린서플 | 왜 소망 너머에 희망이 있는가.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이 지닌 기대감의 종류를 ‘욕구’, ‘욕망’, ‘갈망’ 그리고 ‘희망’ 순으로 열거했다. 욕구(όρεξης)는 appetite(배고픔)이다. 갈망(επιθυμία, desire)은 wish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욕망(θυμός)은 anger(분노)와 동의어다. 분노가 욕망인가? 분노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유추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희망(βούλησης)이다. “will”, “의지”, “뜻”을 이르는 말이다. 나머지 셋은 모두 처음 것인 욕구를 가장 밑에 깔고 있다. 희망 역시 욕구의 일종인 셈이다. 하나의 공이 다른 공을 쳐내듯이 무절제한 경우 하나의 욕구는 다른 욕구를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희망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와 같이 ‘내다보고’ ‘기대하는’ 감정과 행위를 표현할 때, 이상 모든 낱말들과는 별개의 엘피스(ελπίς)라는 말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문(롬 5:1-5)에서 희망을 산출하고 있는 방법을 묵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환란은 인내를 산출한다.
초대교회의 환란은 물리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 물리적 박해를 받는다고 정신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고통은 당연히 정신적 고통도 수반한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그 물리적 환란이 두 번, 세 번…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물리적 고통을 압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신이 처한 상태를 ‘인내’와동일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로써 물리적 환란이 정신적 환란을, 정신적 환란이 인내를 산출한다.
인내는 연단을.
정신적 환란에서 산출된 인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시간이다. 인내가 시간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굳는다. 다시 물리적 상태 즉, 인내가 견고함(steadfastness)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이유다. 이로써 최초의 환란은 연단이라는 제과정으로 완전히 탈바꿈 되어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바라볼 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그래서 인내라는 말은 ‘증거’라는 말도 되는 것이며(고후 2:9), 연단이라는 말은 ‘체험’이라는 말로도 치환되는 것이다. 왜? 체험이 증거이고 증거가 체험이니까.
연단은 희망을.
소망, 희망에서 ‘소’와 ‘희’는 다르지만 ‘망’은 같다. ‘망’은 亡과 月과 王이 합쳐 된 말이다. ‘망함’과 ‘달’과 ‘왕’. 이 한자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달’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새롭게 되는 달의 ‘새로움’은 유서 깊은 관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달아나 버릴지라도 언제나 새로음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 | 희망의 내용.

아이러니하게도 성서 저자가 채택한 엘피스(ελπίς)라는 단어는 좋은 것(good)뿐 아니라 나쁜 것(evil)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왜 나쁜 것에 대한 기대감일까? 그리고 또 왜 그런 어정쩡한 단어를 채택했을까? 예컨대 엘피스는 호기심으로 상자를 연 판도라가 슬픔, 질병, 싸움, 고뇌 등 온갖 나쁜 것들이 튀어 나오는 바람에 절망의 늪에 빠져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뒤늦게 올라온 것, 바로 그것이다. 그때 엘피스라는 단어를 썼다. Hope의 또 다른 희랍어인 블레세스(βούλησης)의 경우는 가장 밑바닥에 욕구를 깔고 있지만 엘피스는 그 자신이 가장 밑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깔려있다. 엘피스는 언제나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판도라다. ‘pan’은 ‘모든’이며, ‘dora’는 ‘선물’이다. 모든 선물. 슬픔, 질병, 싸움, 고뇌, 우리는 고를 수 없다. 다만 가장 마지막에 엘피스가 깔려 있다.
그래서 환란, 인내, 연단, 희망 순인 것이다. 이것이 엘피스라는 희망이 두려움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유이며, 신약성서 저자가 엘피스를 채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본문 v.5에서는 그 희망의 궁극적 내용을 말하고 있다. 바로 “성령으로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내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곧 엘피스인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 이라는 말을 믿음과 소망 보다 나은 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다. 가장 마지막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미지 참조:
www.historyforkid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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