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다큐라는 것을 보고 눈물 흘리며 본 것은 이 분 이야기가 처럼이었을 것입니다. 다들 아시려나 모르겠습니다만, ‘풀빵 엄마’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풀빵 엄마
선천적 소아마비인 최정미씨는 두 아이의 싱글맘이지만 늘 밝게 삽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풀빵 장사로 애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언제나 표정이 밝습니다. 그러나 소화 불량으로 찾은 병원에서 듣는 위암 2기 진단…,
4개월 뒤엔 말기 판정을 받습니다. 자신보다는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살아남으려 애씁니다. 항암 치료로 몸도 가누기 힘든 중에도 그녀는 한겨울 새벽 칼바람을 맞으며 풀빵 장사를 나갑니다. 유일한 생계 수단이 바로 풀빵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큰 딸 은서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빨리 철이 들었습니다. 엄마 대신 동생을 건사하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인데도 엄마가 아파 누워있으면 설거지도 하면서 늘 엄마 걱정을 하는 딸입니다.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 잘 때 은서는 아픈 엄마를 위해 매일 기도를 합니다. “내가 엄마한테 잘해준 거 있으면 좋겠는데, 근데 잘 해주는 게 없어요, 엄마한테… 하나님한테 기도하면 나을 수 있을까…, 애들 잘 때…, 매일 기도해요.”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일곱 살 은서의 말입니다.
설날 그녀는 아이들에게 떡국을 끓여주었습니다. 작년에는 아파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떡국 먹던 큰 딸 은서가 떡국을 숟가락으로 떠 엄마 입으로 넣어주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엄마 눈물에 은서와 홍현이도 엉엉 울어 눈물의 떡국이 되고 맙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내년에도 맛있는 떡국 만들어줄께.”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만 아이들 곁을 떠났습니다. “아이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이러고 쭉 살면 안되나요?” 이렇게 욕심 없는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최정미씨는 2009년7월30일 수많은 분의 격려와 성원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대한 세 가지 반응
불가항력적이고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고난과 고생을 접할 때 ‘시험’이라는 말을 곧잘 씁니다. 그 시험이 지속되거나 연속될 때 우리는 그 시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는 건가?”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라는 질문이 잇따릅니다. 그게 아니면, “마귀가 시험하는 건가?” 그렇다면 “마귀가 괴롭히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뭘 하신데?” 라는 질문 또한 잇따를 것입니다.
이들 잇따르는 질문 속의 공통분모는 “나는 시험을 받는다.”라는 사실 외엔 뭐가 어떻다 확정 지을만한 것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욥기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아예 의인화해 천상의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를 통해 표현하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오랜 문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나님과 사단의 실존적 대치 국면으로 보는 설명도 있지만, 현대적인 논거는 욥기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욥기가 욥의 시험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시험의 원인 자체에 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하늘로부터 출발한 그 시험에 대한 지상에서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음 세 가지로 그 반응을 요약합니다.
첫째, 사람들의 반응
여기서 ‘사람들’이란 친구들을 말하겠죠. 친구는 결코 흔치가 않은 법인데, 인간 주변의 모든 등장인물은 인간의 친구입니다. 짐승은 아니니까.
욥의 불행을 듣고 사람/친구들이 달려왔습니다. 모든 소유와 건강까지 파괴된 욥에게 친구들이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들이 욥에게 내놓고 있는 것은 건강에 필요한 어떤 약재나 재산을 다시 일으킬만한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말들”을 쏟아 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들이 쏟아 놓고 있는 그 여러 말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의 죄를 기억해내라.”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반응
그리고 이 같은 불행의 중심 선상에서 욥이 보이는 반응 역시 “말들”밖에는 달리 없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친구들의 지속적인 정죄에 욥의 말은 한마디로 “나는 완전하다.”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순전하다’로 번역된 탐(תָּם)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반응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반응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이 모든 ‘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실상 그 말씀은 주로 욥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38장-41장). 실제로 회개도 욥이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42:1-6) 그렇지만 심판은 세 친구에게 주어지고 도리어 욥은 더 옳다는 평가로 역전됩니다(42:7). 즉 “완전하다”(1:1, 8; 2:3) “까닭 없이”(1:9; 2:3)라고 했던 욥의 평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 반응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욥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자원(성품이나 행위나 말)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규정으로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시험에 따른 그 어떤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만의 독립 관계 틀 속에서만 그 완전함이 유지되었고,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확인될 때 비로소 다른 환경 곧, 사람이나 물질과의 관계가 재형 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표정
욥의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리라.” 여기서 비웃는다는 표현은 매정하고 무자비하다는 뜻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환경의 반응이나 나의 반응으로 정의되고 규정될 수 없는 고유한 하나님 주권과 질서에서 엿보이는 무표정의 일종이었을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이고 애처로운 고난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표정해 보이시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오늘도 ‘풀빵 엄마’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