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동심

내가 위그던씨 사탕가게에 처음 들어섰던 것은 4살 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총천연색 사탕을 팔았다. 그 멋진 사탕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린애에게 쉽지 않았다. 고른 것을 담을 때면 늘 후회했다. 딴것은 더 맛있지 않을까? 더 오래 먹지 않을까? 위그던씨는 언제나 마지막까지도 바꿀 기회를 주셨다. 우리 어머니는 장을 다 볼 때마다 위그던씨네에 날 데려가곤 하셨는데, 그 때 난 돈이란 게 뭔지를 몰랐다. 어떤 봉지를 건네주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뭔가 건네는 것을 지켜보면서 교환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혼자서 위그던씨를 찾아갔다. 나는 그 곳에 있는 사탕들 중 쵸코땅콩, 왕사탕, 그리고 총천연색 아기모양 젤리를 골랐다. 위그던씨는 작은 봉지에 그것들을 담아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물었다. “너 이것들 살 돈은 가지고 있니?” “아, 네. 저 돈 많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주먹을 펴 위그던 아저씨 손에다가 체리 씨 6개를 건넸다. 그는 자기 손에 놓인 그 체리 씨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부족한가요?”라고 묻자 그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좀 많구나.” “네가 거스름돈을 받아가야겠다.” 그리고는 2센트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 일은 몇 년이 지나면서 잊혔다. 

내가 6~7살 될 때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자라나 나는 결혼도 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열대어 가게를 열었다. 모든 종류들이 한 쌍에 5달러 정도 했다.

해가 쪼이는 어느 날 오후 작은 소녀 하나가 남동생을 데리고 왔다. 5-6세 정도 되어 보였다. 내가 어항 청소를 바쁘게 하고 있을 때 그 애들은 물속에서 노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보았다. “우와,” 소년이 소리쳤다. “이거 우리가 좀 살 수 있나요?” “그럼, 살 수 있지.” 나는 대답했다. “너희들이 그 값만 지불한다면-” “물론이에요. 우리 돈 많아요.” 그 작은 소녀는 말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중에 뭔가가 나에게 이상한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얼마동안 물고기를 지켜본 후 그 애들은 다른 종류의 열대어 몇 쌍을 내게 주문했다. 나는 아이들이 고른 것들을 작은 비닐봉지에 넣어 소년에게 건넸다. “조심해서 가져가라.”고 말하자 소년은 “네, 그럴게요.”라면서 돌아서서는 “돈 드려.”라고 누나에게 말했다. 난 내 손을 건넸고, 그리고 그 소녀가 주먹을 펼 때 갑자기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소녀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주먹을 펴 나의 손바닥에 동전 3개를 떨어뜨렸다.

순간 나는 위그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 노인에게 어떤 곤란을 안겨주었는지, 또 그가 자신이 직면한 그 상황을 얼마나 훌륭하게 대처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 손에 있는 그 동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그 작은 사탕가계에 다시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두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순수함을 지켜줄 수도, 또 파괴할 수도 있는 힘에 대해 이해가 갔다. 오래전에 위그던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이 메어 오르는 기억이 내게 차올랐다.

“부족한가요?” 그 소녀가 말했다. “조금 많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거스름돈을 받아가야겠다.” 그리고 2센트를 그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그 아이들이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 애들에게 준 열대어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아내가 말했다. “30달러 정도…”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소.” 내가 위그던씨에 관해 아내에게 이야기 해주자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히면서 나를 뜨겁게 안아주었다. “여전히 그 사탕 냄새가 나…” 나는 숨을 내쉬었고, 마지막 어항 청소를 마쳤을 때 내 어깨너머로 위그던 아저씨 웃음소리가 들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린서플 | 세 단계의 지혜

지혜를 세 종류로 나누었을 때, 그 중 가장 우월한 지혜를 예화로 보았습니다. 그들 세 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능으로서 지혜 (창 2:19)
아담에게는 각종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둘째, 꾀로서 지혜 (창 3:13; c.f. 시 1)
뱀은 꾀를 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지혜는 속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파괴를 하기도 합니다.
셋째, 이해로서 지혜 (막 9:36-37; c.f. 잠 31:10-31)
어린 아이를 이해하고 그들처럼 되라는 것은(c.f. 마 18:3) 애들 흉내를 내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곧,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지혜를 지표하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최종적 지혜의 목적(Telos)

이 세 번째 지혜가 없다면 그리스도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가 한 일이 뭔지를 알지도 못하게 되므로 그분처럼 살아갈 수도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혜는 아직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동심(the innocence)이며, 그 자신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그것을 받으십시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