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졌고-”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보인바 된 우리 겸손의 결핍, 기억의 결핍, 두려움의 결핍 등이 우리 앞에서는 보인바 되지 않는, 불가피한, 그렇지만은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보인바 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움이다.
하나님의 그 모든 불가사의한 피조물 – 예컨대 동물원으로서 이 세계? – 우리가 답은 갖고 있지 않은 그 수많은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 한 분, 하나님 그분 자신, 그분만이 그 대답이시다.
차분하고도 진정한 편견 없는 신심을 통해 그 신성한 “부정하심,” 곧 거절하심의 응답은 확립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이해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폭로 됨에서 오는 그 건강한 “위기” 속으로 우리 존재를 운반해오는 일을 저지할 수 있는 것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반론할 여지가 없는 실체 곧, <확실히 보인바 된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내지 않으심>이다. 예를 들면 부활이다. 그것이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롬 1:19)인 것이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그분에 대해 알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 우리는 그분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그분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 그 이유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모든 신들을 뛰어넘는 그분의 탁월함이 드리워져 있다. 여기에 하나님으로서,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롬 1:16) 그분의 기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심판대 아래 이미 서 있던 이들에게는 노출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심판을 알 수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롬 1:20)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보는 데 실패하고 듣는 데 실패한 데서 비롯된다. 보는 눈을 가지고 듣는 귀를 가지고서 그들은 그들 할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