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에 나타난 한국인과는 다른 정서라는 주제 아래 12가지 상징을 반성적 시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따라서 몇 가지 주의가 요구됩니다. 이를 테면, “NO JAPAN. 가지 않겠습니다. 사지 않겠습니다” 캠패인에 매진하는 독자라면 읽기에 괴로운 내용일 수 있으니 안 읽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기독교인이신 경우, 이 글은 기독교세계관 측면에서 폭넓은 해석학적 수준을 요구하는 전개이므로 훈련되지 않은 기독교 독자 역시 안 읽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지도 능력을 갖춘 교사와 함께 읽으십시오.
종말
지진이나 냉해 같은 실존의 재앙을 상시로 곁에 두고 살아가는 스즈메의 종말은 한국인의 종말보다 진지하다. 지진 같은 예측 불가능한 환경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한국인의 종말은 소리만 요란한 과장과 기만을 자기들의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추출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히려 옴진리교의 독가스처럼 뿌옇고 추상적인 종말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스즈메가 차리는 종말의 식탁은 더 진지하고 경건해보인다.
카르마
스즈메의 피할 수 없는 지진과 냉해는 고도의 카르마를 윤리로 낳았다. 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보여준 중국인의 정체불명 혼종 카르마보다 신선하다. 환생의 교리를 절제되고 간결한 윤리로 환골탈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윤리는 이미 <부도리의 꿈>에서 어린 자식의 식량을 남기기 위해 냉해로 덮인 산으로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윤리로 선보인 바 있으며, <너의 이름>에서는 실의 매듭으로 생을 이어가는 우아한 연기(緣起: 불교의 인연)로 승화했다. 그리고 스즈메는 이웃의 사랑을 자기 운명의 연기로 제시한다. 이 카르마의 윤리는 한국의 <기생충>, <설국열차>에 담아낸 고질병 ‘남탓’을 부끄럽게 만든다.
편견
스즈메의 플롯은 일상이다. 한국인의 플롯이 언제나 재벌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은 언제나 박해 받는 희생자에서 마침내 드디어 재벌이지만, 스즈메의 일상은 하나 같이 ‘이웃’이다. 입에 담아본 지 오래된 그 이름 ‘이웃’. 예컨대 스즈메를 길거리에서 차 태워준 친절한 아주머니의 직업이 선술집 마담이라는 사실은 재벌로 물든 한국인의 일상과 편견을 무참히 박살낸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스즈메의 독특한 윤리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마저 동화로 만든다. 일본 망가를 카피해 만든 <올드 보이>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자기 눈 대신 뽑아내는 혀의 잔혹함이었다면, 스즈메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의자이다. 아기 때는 다리가 4개인 의자, 그리고 성년이 되어서는 자기 앞날을 모르는 다리 3개짜리 의자. 이 3개짜리 의자를 과거 속 자신에게 선물함으로써 자기 운명/하마르티아를 극복한다. 일본의 수많은 컨텐츠를 표절(내지 리메이크)해오면서도 <올드보이>같은 저열한 혓바닥만 카피할 줄 알았지, ‘노란 의자’ 같은 가치는 절대로 알지도 못할 뿐더러, 그래서 가져오지도 못하는 현실이 한국 문화계의 정서이다.
고양이
스즈메에서 고양이는 세 발 의자만큼이나 중요한 캐릭터이다. 고양이가 등장하면 언제나 개를 떠올리기 마련. 고양이와 개는 고기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데도 인류 역사에 있어 인간과 가장 근접 거리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래서 둘은 언제나 경쟁적으로 비쳐 상대적 특성으로 쌍을 이루며, 개는 충성을,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는 습성을 표지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고양이의 위상은 ‘헬로우 키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가장 오랜, 가장 세계적인 일본 캐릭터이다. 그 전통은 17세기 에도시대의 우키요에(파도 그림으로 유명한) 도상에도 자주 등장한다. 개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를 제외하곤 일본에선 언제나 고양이가 압도적이다. 고양이에 대한 일본인의 이같은 편애는 스톱 애니매이션 <개들의 섬>에도 역설로 나타나 있다. 본래 일본에는 ‘고양이 섬’이 있지, 개들의 섬은 없다. 영화에서 개들의 섬은 개를 버리는 쓰레기 섬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애완동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애완’이란 명칭을 못 쓰게 하고 ‘반려’라는 명칭을 쓰게 한다든지, 고도의 감성 정치인이 애완동물에게 직접 선거 운동을 한다든지.., 동물구조 캠페인을 벌이며 후원금만 챙기고 안락사해버리는 단체와 교감하던 정치인 중에선 대통령까지 배출되었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고양이나 개들에게 섬을 내어주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스즈메는 극중에서 이 고양이를 ‘다이진’이라 부른다.
다이진
스즈메가 고양이를 ‘다이진’이라 부를 때 문득 ‘다이묘’를 떠올렸다. 일본(어)에 문외한인지라 비슷한 독음 탓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다이진은 고급 관료인 대신(大臣) 또는 큰 신으로서 大神, 모두 다 된다. 내가 떠올린 다이묘는 지방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을 가진 자’라는 뜻인 이들 다이묘(大名)는 지방분권의 상징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본 없는 자도 이 다이묘 트렉을 타고 이름뿐 아니라 천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다이묘가 어떤 덕을 갖췄느냐에 따라 ‘이름 없는‘ 백성들 삶의 질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재해관(재앙에 대한 세계관)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다이묘들 중 인텔리들이 등장하면서는 지진이나 재해의 원인을 자신의 부덕으로 여기는 재해관도 생겨났다.
원령(animism)들의 장난으로 지하 수중에서 사는 매기가 날뛰어서 발생하는 것이 재앙이라 여기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세계관에 비하면 매우 뛰어난 윤리 의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관료가 지방 다이묘였든 아니면 중앙 관료 다이진이었든 사후에는 그런 덕망에 기인하여 지역 열도의 재앙을 누르고 버티는 가미 요석으로 추념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역 토호 출신 다이묘들이 대부분 모든 행정을 오로지 자신의 차기 선거에 맞추고, 더 나아가 국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앙의 원인을 오로지 상대 정파의 다이진 탓으로 선전/선동해 권력 탈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재앙관과는 비교되는 재해관이라 할 수 있다. 필경 내일도 발생하고야 말 그 모든 재앙은 누구 탓인가.
박가야로
스즈메가 여행하다 만난 친구 치카의 입에서 ‘박가야로’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그동안 ‘빠까야로!’로만 알고 있던 발음을 너무나 아름다운 어조와 악센트로… 박/가/야/로.. 어찌나 아름답고 사쁜히 발음하던지, 과연 스즈메는 ‘바/보/녀/석’도 아름답게 표현하는구나… 하지만 아름다운 스즈메를 제외하곤 일본 콘텐츠가 얼마나 도색적이고 무익한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겉으론 동화같은 스미마생, 뒤에선 야비하고 도색 찬란하다는 것이 한국인의 평가다. 그러나 그 도색 콘텐츠의 최대 소비자가 다름 아닌 한국인이란 사실은 안 비밀. 공창 제도를 소멸시킨 지가 언젠데 다양한 도색 소비가 이 선비의 나라에서 유지되고 있다. 아름다운 ‘박가야로’의 이중성과 조선 선비들의 이중성에 대한 비교는 참으로 흥미롭다. 그것은 특별히 음지의 민주 투사들이 메이져 정치 무대로 올라오면서 구체화되었는데 여성 인권 미투의 성지와도 같은 정파 진영에서 성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이중성 측면에서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
적지 않은 사람이 스즈메의 ‘문’을 가리켜 우리나라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문’을 표절한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스즈메의 감독이 “모티브를 따왔다”고 홍보용 립 서비스를 했다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즈메의 ‘문’이 <도깨비> 문과 비슷하다면, <도깨비>에 나오는 그 ‘문’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문’을 아예 통채로 뜯어온 것이다. 스즈메 ‘문’에 대한 착시는 그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대중 문화 표절에 대해 유별나게 용서를 못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어떤 창작 윤리에서라기보다는 원조 컴플렉스에 기인한다. 마치 성 윤리에 가장 도덕적이고 청결한 한국인이 사실은 가장 왕성하게 성 콘텐츠를 소비하는 순결 컴플렉스와도 같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얘기가 나오니까 히사이시 조의 위대한 음악이 생각나는데 스즈메에서 음악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음악 / 소리
스즈메에서 나오는 음악과 소리는 모두 낯익다. 싸구려 선술집의 가라오케 음악이든, 오픈 스포츠카를 모는 젊은이가 흥얼거리는 최신(당시로선) 음악이든 낯익다. 팝송의 낯익음과는 별개의 낯익음이다.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의 음유 시인 나훈아는 말하기를 “트로트는 도롯도의 카피가 아니라 컨츄리송의 유사”라고 둘러댄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낯익음이란 단순 표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서의 호환 관계를 일컫는다.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기괴한 괴성과 노래를 섞어 부르기로 유명한 ‘이박사’란 분이 방시혁이나 박진영 같은 프로듀서 없이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린 것은 이 문화 유전자의 유사를 방증한다. 여러 면에서 가락이 편한 것이다. 피차에.
이런 자연스런 문화 융합 관계를 회피한채 적개심을 품고 반일을 유포한 것은 대다수 한국 문화 연예인 자신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와 이념을 가사로 쓰는 사치를 시작한 셈이다. 대중 문화인들이 부르는 이념의 노래는 문화계 전방위에 미처 동료 연예인 간에 편을 가르고 일감을 독식하는가 하면, 이념이 다른 동료들이 막노동을 전전해도 외면했으며, 심지어 개그/만담꾼조차 이념의 페르소나를 입는 기형을 초래했다. 그 결과 개그쇼는 일찍부터 망했고, 영화도 망해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당연한 결과이다. 쇠락해가는 한국 문화인은 스즈메에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 한번 들어보시라. 단순한 ‘소리’인데도 가히 뮤즈의 경지이다. 이와 같은 소리와 플롯 컷팅(edit)의 예술에 집중은 안 하고 대체 무엇들 하고 계신가. 묘석을 뽑아내며 재앙을 즐기는 한국 다이묘들에게서 신속히 떠나 창작에 매진할 것을 권면드린다.
이모
어릴 때 순두부 집엘 가면 꼭 “이모~”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 “니네 이모시냐?”(내가 이 정도로 순진했어)고 물으면 친구는 아뭇 소리 없이 반찬만 집어 먹고 있었다. 딴 녀석하고 그 집엘 또 가면 그 인간도 “이모~”하고 부르네? 아니, 왜 니네 이모도 아닌데 다들 이모라고 부르냐… 이모(姨母)는 어머니의 자매를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나라는 부계와 모계의 친족을 가장 철저하게 구별하는 민족이다. 영어권에선 이모와 고모를 구별한 명칭이 없고, 일본에서도 ‘오바상’ 하나로 통한다. 한자로는 姨母(이모)가 아닌 叔母(숙모)라 쓰며 오바상으로 포괄한다. 서구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구별 않는 모계에 대한 이토록 강한 구별은 한국의 강력한 부계 중심 구조를 반증한다. 자기 어머니와 한 집안에서 낳고 자라 어머니와 친밀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친근한 대상이기에 순두부집 언니들에게도 내돌리는 호칭이지만, 고모는 어머니를 어렵게 하고 꽤 근엄한데도 우리 집안 사람이니 이모와는 구별된다는 정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모와 고모의 명칭 구별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하필이면 스즈메의 오바상은 叔母가 아닌 姨母(이모, 어머니의 동생)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스즈메의 나라에서 “이모는 엄마다.” 옛 난리 통에는 엄마가 죽으면 이모가 엄마가 되어(즉 형부의 아내가 되어) 조카를 자식으로 기르며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언젠가 배우 이해숙씨가 출연한 한국 드라마에서 못되먹은 딸의 ‘출생의 비밀!’ 하여 알고보니 엄마가 아닌 이모(이해숙)였더라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일본의 경우 고대 이스라엘의 형사취수혼(兄死娶嫂)처럼 형의 사망 후 형제가 그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는 경우가 있고, 자매 또한 자매역역혼(姊妹逆緣婚)의 경우가 적지 않았던 걸로 안다. 일반적이지는 않은 관습이기에 이상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는 재산 유출의 방지가 목적이었고, 일본의 경우는 난리(제2차 세계대전)와 재난 특히 지진에 파괴된 가정 그리고 그 재난의 고아들을 거두는 목적이 컸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사망자는 1만5천800여명, 실종은 2천500여명, 대피생활 중 숨진 사망자 3천523명, 도합 2만2천명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스즈메는 다름 아닌 지진 고아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모’는 재앙에 대한 재건의 상징이다. 특히 스즈메에게는 혈족 이모뿐 아니라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친절한 이웃이(선술집 마담 아줌마까지) 이모요 형제다. 그런 공동의 선이 스즈메를 재앙을 틀어막는 토지시로 키운다. 이모가 스즈메에게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널 키우는 게 쉽지 않았어. 집에 손님을 데려올 수도 없었고 그래서 결혼도 못했고…네 엄마가 남긴 유산이 내 인생을 바꿀 정도로 많았던 것도 아냐.” 진실되고 참된 이모가 아닐 수 없다.
종교
토지시…. 뭔가 멋진 특수 임무역 같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토지시는 무당이다. 결국 지금까지 이어가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미안하지만 무당이 되어가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한낱 무당 이야기를 이토록 완성도 높은 플롯으로 결합해낸 걸 보면서 일본에서 기독교가 왜 한국과 같은 양적 팽창이 어려웠는지를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공동선(共同善)의 선점에 기인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선이란 4세기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공동선이 된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 이전에는 헬라의 만신전이 공동선이었다.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자랑하던 콘스탄틴이 정작 기독교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헬라의 신들을 믿는 로마 시민과 기독교를 믿는 로마 시민, 양자를 대표하는 대사제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일본의 고관대작 다이진들이 국제적 망신을 무릅쓰고 야스쿠니에 무당을 앞세우고 들어가 경배하는 이유와 들어맞을 것이다.
무당들은 무당들 대로 전범만이 아니라 재난 희생자들의 위패를 같이 합장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걸로 보인다. 지진 고아 스즈메에 묻어 감으로써 영생하려는 전략이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공공선이며 질서이다. 한국에서 조상 제사 지내는 사람치고 종교로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이와 같은 질서로서의 공공선은 또 다른 재난 발발시에 결코 줄을 앞지르지 않는 ‘배려’로 발전했고, 전철 옆좌석 사람이 토를 해도 찌푸리지 않는 ‘배려’를 낳았다. 배려란 자립심과 이어져 있기 미련이다. 이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반려자로 선호하는 사회성으로 이어진다. 개는 충성을,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는 자립심 강한 동물이라고 앞서 일러 두었다. 한마디로 여러 죽음의 형식 중에서도 유독 고독사를 선호하는 이치이다. 이 자립심이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무당의 도덕’을 그려낸 저력이다.
공교롭게도 엊그제 ’장군신‘을 믿는 사람을 두 명 알고 있다는 말을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뭐? 무슨 신?“ ”장군신이요.“ ”두 사람이 같은 데 빠진거야?“ ”아니요. 둘은 서로 몰라요.“ ”아니, 믿어도.. 뭐 그런… 무당에 빠진거야 뭐야?“ 그렇다. 21세기 2023년도를 살아가는 도시의 건장한 청년들이 단순히 점이나 보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아예 그 무당이 섬기는 ’장군신‘을 따라 섬기는 일이 횡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의 <문단속> 수준이다. 교리는 있는데 질서는 없어진 기독교. 질서는 퇴행했는데 너무나도 고결한 교리로 치장되어 있어 스즈메가 다가가기엔 너무나 높은 보좌가 아닐 수 없다. <문단속>도 못한데다 “의(義)와 인(仁)과 신(信)도 버린“ 것이다(마 23:23).
아버지
이상하게, 아버지가 없다. 안 나온다. 일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오또상(아버지)이고, 오또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오야붕이고, 오야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지진이기 때문에 끼지도 못한 것일까? 전후 일본을 재건한 것은 야쿠자와 어머니란 말은 들어봤어도 야쿠자와 아버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일까. 스즈메에게만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라, 소카에게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시조 신(始祖 神)은 여자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