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2015)에 관한 짧은 소고이다.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를 좋아하기 때문. 둘째, 로버트 드니로가 노익장! 멋진 연륜으로 철없는 젊은 여성(Anne Hathaway)의 경영권 방어 따위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머 그런 박진감 있는 영화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 예상을 빗나가 약간은 시시한 ‘사랑’에 집중하고 있다.
시시하다는 건 (로버트 드니로를 기대한) 내 예상에 빗나갔다는 뜻이지 재미없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사랑’에 대한 깊은 주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갖는 ‘종류’에 관한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는
1) 마치 러브 액츄얼리(2003) 같은 분방한 서구 젊은이들의 사랑(성 개념),
2) 편안하고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사랑
3) 부성애…
다양한 사랑이 등장한다.
그 사랑의 정점은 로버트 드니로(밴)의 알 수 없는 눈물에 있다.
그것이 사랑을 ‘종류’ 짓게 하기 때문이다.
위기에 봉착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 상사(줄리)와 함께 출장을 갔던 숙소에서 그것은 절정을 이룬다.
원래 방은 따로 썼기 때문에 그녀의 방에 들어가려 들어간 게 아니다.
깊은 대화 끝에 그녀는 잠들고,
잠든 그녀 옆에서 그는 눈물을 흘린다. 그는 왜 울었을까?
영화상에서 두 사람은 모두 이성의 사랑을 하나씩 갖고 있고 그 대상에 두 사람 모두 만족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 간에 흐르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영화가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사장님을 향한 충직한 충성일 수도 있고,
거기서 깊어진 우정일 수도 있고,
보다 깊어진 부성애일 수도 있다. (젊은 여성은 부모정 없이 자랐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성애 모티프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사랑은 여러 가지인가? 한 가지인가?
여러 가지라면 그 각각의 성애 자신은 타고난 것인가? 한 가지 사랑에서 분화되는 것인가?
한 가지에서 분화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지면 커지는 능금’인건가?
사랑에는 잘 알려진 대로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가 있다.
프로이트 같은 계몽주의의 사도는 사랑은 오로지 한 가지라고 하였다. 성욕.
반면 기독교는 그 한 가지를 아가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아가페에서 에로스로 진화되지는 않는 것 같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 간에 이런 세 번의 대화가 오가는 게 담겨있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ἀγάπη)하느냐?
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ἀγάπη)하느냐?
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φιλέω)하느냐?
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έω)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ㅡ요한복음 21:15-25
학문적으로는 이 두 종류 사랑에 어떤 별다른 의도된 차이가 없는 것으로 결론들을 내는 편이다.
왜냐하면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이 복음서에서의 용례가 전혀 일관성 있는 차이로서 의미를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아가페 하느냐?’고 계속 묻는데,
시종일관 ‘필레오 한다.’고 대답하는 것도 (아무런 의도가 없다기엔)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아마도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암시와 연관된 것 같다.
아가페와 필레오의 차이에 관한 규칙이 이 다이얼로그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베드로가 필레오를 유지하는 것은 일관된 의지로서 규칙성이다.
그는 아마 자신의 실패를 교훈 삼아
다음 말씀/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해보이기로 작심하는 듯싶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ㅡ요한복음 15:13-15.
계속되는 질문에 두려움의 표정을(요 21:17) 지었던 건 아마도 그런 자기 죽음의 예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필레오를 다른 말로 바꾸면,
1. 네,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줄[φιλέω]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2. 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줄[φιλέω]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3. 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줄을[φιλέω]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실제로 이 다이얼로그 직후에는 베드로에 대한 이런 예언이 하나 나가고 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ㅡ요한복음 21:18-19
에필로그.
밴(로버트드니로)이 가졌던 사랑의 종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그는 자신의 사랑을 한 종류로 지켰다.
그러니까 밴이나 베드로가 했던 사랑의 정체는 아가페냐 필레오냐 그 음가나 어의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이라는 어떤 패턴에 그 정체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물음 속 사랑에는 변화가 있는데, 베드로의 답변 속 사랑에는 변화가 없는 것)
이 주제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논거를 보려면 ‘필레오 사랑─구원받기 어렵게 만드는 요한복음의 필레오’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