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는 ‘공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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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는 ‘공유’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공유, 공생, 공감 따위를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슷한 것 같지만 코이노니아와는 다른 개념들이다.

1. 우선 공유에 대한 정의이다. 공유란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이 지분 형태로서의 공동에게 귀속된 소유의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지극히 법정적 성질의 개념이다. 단일한 소유권을 여럿이서 분량적으로 분할해 소유하는 상태를 이르기 때문이다. 옛날에 중형교회에 있을 때, 어떤 여자가 분노에 차서 교회를 떠나면서 이르기를, “내가 이 교회에다가 쏟아 부은 게 얼만데!” 하고 소리치면서 교회 현관을 박차고 나가는 걸 본 적 있다. 이 여자가 인식하고 있는 게 바로 공유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코이노니아가 아니다.

2. 아울러 공생이란 각기의 다른 종류(주로는 둘)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양자 간에 이익이 어느 편에 편중 되느냐, 혹은 손해를 끼치느냐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분화된다. 세 가지로 요약해서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우선 첫째, 상리공생(mutualism)이라는 게 있다. 둘 다 이익을 얻는 관계다. 그리고 둘째, 편리공생(commensalism)이라는 게 있다. 한쪽만 이익을 얻는 관계다. 그렇다고 다른 한 쪽에 불이익/손해가 끼쳐진 경우는 아니다. 끝으로 셋째, 우리가 잘 아는 기생(parasitism)이라는 관계가 있다. 이것이 한 쪽만 이득을 얻고 다른 한 쪽은 피해를 보는 관계의 경우다. 피해 보는 편을 숙주(host)라고 부른다. 몇 해 전에 안보 문제로 해체 당한 정당이 있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정당이 국회에 입성하기까지 아무아무 정당이 숙주 노릇을 했다.” 라는 표현을 썼으나 그릇된 표현이다. 숙주는 손해본 자를 일컫는 말인데, 그 (숙주) 정당은 피해를 본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코이노니아가 아니다.

4. 공감은 위와 같은 법정적 또는 생태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 요소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가 되어 그 입장으로서 느낄 수 있는 지각 능력을 말한다. 함께 느끼는(feeling with) 어떤 동감(sympathy) 능력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감정 이입(feeling into)의 능력이다. 없어선 안 되는 심리요소이기는 하지만 이런 능력은 무당이 더 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것도 코이노니아의 본질은 아니다.

5. 성서에 나오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우선 70인 역에서 사용된 예시들이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왕과 교제하는데 쓰였는가 하면(대상 20:35), 연합/결합적 관계를 표현할 때도 썼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녔다는 데 쓴 예로(욥 34:8), ‘연합’, ‘동맹’이라는 뜻의 헤브라(חֶבְרָה)를 코이노니아로 번역했던 것이다. 그러나 70인 역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어떤 신과의 교제를 정식으로 의식하고서 쓴 예는 거의 없다.

6. 그것은 신약성서 공동체들에 의해 진작된 개념으로서, 초대교회 설립자들에 의해 코이노니아가 쓰일 때는 70인 역의 개념보다는 도리어 플라톤의 국가(The Republic)에 사용된 용법과 더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들 또는 개인적인 정의(正義), 그리고 사회에 대한 보편적 주인의식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책임감을 표명하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의 코이노니아가 사회적 탐욕인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와 구별된 정책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 목회자나 교회가 마치 코이노니아의 정의가 공유인 것처럼 설파함으로써 신마르크시즘에 종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인 것이다.

7. 그것은 어디까지나 급하고 강한 바람 곧, 대기 중에 분여된 하나님의 호흡(성령)을 나눠쓰되 궁극적으로 통일된 언어 사건으로 귀착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마리의 리워야단을 지향한다. 즉 알 수 없는 말로 통일을 이룬 나라(the Public)인 것이다. 이것이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방언으로, 그리고 그것이 공동의 식사 공동체로 성징화를 띠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후기 사역으로 접어든 그리스도의 완연한 몸으로서 교회를 표명한다.

8. 그러니까 코이노니아의 본래 의미가 오로지 ‘책임감’으로 귀착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늘날에 공유, 공생…으로 전용된 코이노니아는 (말은 아니라곤 하지만) 한 마디로 소유권과 이익에 대한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오용이라 할 수 있다.

cf. 고전 1:1~9. (cf. 사 49:1~7; 시 40:1~11; 요 1:29~42.)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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