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이스라엘, 세속 유대인, 동성애 랍비, 흑인 유대인,
현대적 의미로서의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

시대의 극단적 절망은 모든 면에서 급진적 종말 색체를 띠기 마련이다.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그랬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에게 그랬듯이, 이 시대 우리 사회도 곳곳에 그 급진성이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는 사회 대로 ‘적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그 맞수들을 색출해 내고 있는가 하면, 종말론적 종교는 그 종교 대로 배도자의 이름을 난발함으로 자신의 맞수들을 색출해내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를 테면, 이른바 세대주의 내지 고토신학 추종자들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이라는 술어의 원용적 의미를 취하여 준거로 삼으면서 대다수 보편 교회들을 거의 배도자 수준으로 몰아붙이지만 사실 현대 유대인 게토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런 영적 국수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세속 이스라엘
유대인(?) 청년

이 글은 현대적 의미의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돕고자 작성하였다.

유대인의 명칭

유대인 혹은 유태인, 우리나라에서는 명칭부터 오락가락하지만 정확한 한글 표기는 유대인이 맞는 것이다. 유대인을 희랍어로 유다이오스라고 하는데, 유다이오스라는 말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룬 지파를 유대(Ιουδαία, Judea)라고 부르는 데서 온 명칭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랑스식으로 Gew라고 쓰이다가 영어화 되면서 Jew가 되었고, 유‘태’인이라는 한글은 아마도 중국식 표기에서 온 발음일 것이다.

본래 이들의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이 맞지만, 다윗 왕이 통일 왕국을 이룩한 후 3대를 못 넘기고 손자(르호보암) 때에 가서 나라가 분열 되었다. 다윗이 속한 지파 유다와 그의 친동생 지파 베냐민이 남 왕조로서 잔류했고, 그 나머지 10지파가 동맹해 갈라져 나가 북 왕조를 차리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들고 나갔다.

다윗의 후예들은 국호에 큰 집착을 보일 필요가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북 왕조는 이름을 통한 연대감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애쓴 일면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간에는 ‘유다’라는 지파 명에 부여하려는 나름의 권위와 컴플렉스가 공존했던 것 같다. 열왕기하 16장 6절에서 이 명칭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명칭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멀리 이국땅에서 포로이자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그들 자신을 이르는 넓은 의미의 칭호가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고 하면 포로 귀환 공동체 이후 세대를 특정하는 명칭이다.

유대인의 현대적 의미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하면 매부리코에 곱슬머리 백인만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유대인은 학술적으로 세파라디(Sepharadim), 아쉬케나지(Ashkenazim), 팔라샤(Falasha), 이렇게 셋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셋에다 동성애 유대인(Gay Jews) 그룹 하나를 더 추가 해야 한다. 2014년 8월 2일부로 이들 동성애자 유대인을 이스라엘 본토 이주자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그 외 유대인의 동성애에 관한 정서 참조

우선 세파라디는 스페인과 지중해 출신 유대인을 이르는 말이라면, 아쉬케나지는 독일, 러시아, 동유럽 출신 유대인을 일컫는 명칭이고, 팔라샤는 이디오피아계 흑인을 지칭한다.

Commandment Keepers Synagogue in Harlem, NYC. Photography by Chester Higgins

* 흑인 유대인(Black Jews) 외의 다양한 인종의 유대인 쉐이프를 보려면 http://ziomania.com/ashkenazi/ashkenazi.htm 참조.

우리가 성서에서 만나는 유대인은 세파라디이지만, 오늘날 유대인의 대부분, 특히 미국의 85%에 달하는 유대인은 바로 아쉬케나지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국제사회의 경험이 적은 우리 일반인들은 위의 분류도 사실 생소할 수밖에 없지만 더욱 문외한 것은 저 아쉬케나지에 대한 역사 이해이다.

현재 적지 않은 유대민족 전문가들이 그들을 가나안 출신의 셈족이 아닌 종교만 유대교를 선택한 터키계 백인 카자르 후손이라고 확신하는데, 지금의 조지아(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 부근에 왕국을 형성했던(630/640년) 이들 카자르 족은 당시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의 차별성을 위해 뿌리는 같다고 생각한 유대교를 제3의 종교라는 취지에서 선택해 개종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런 연유로 아쉬케나지 유대인을 이른바 열세 번째 지파(The 13th Tribe) 반열의 유대인이라 일컫기도 한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에는 지금도 스스로를 노아의 후손이라고 믿는 이들이 남아있다는 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들이 현재의 이스라엘 및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주류이며, 이들이 또한 시오니즘 운동도 전개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국가도 이들의 저력으로 창건된 것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속 이스라엘로서 유대인

게다가 여기에 덧붙여 현재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종교적 국가로만 보는 것은 대단히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보수적 종교 우파들이 국가와 부딪치는 여러 사례들, 그리고 이스라엘 현지에 ‘유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종들이 있는데 이들의 인종 가운데는 피부색이나 두상 골격뿐 아니라 성 소수자/동성애자를 포함한다. 지난 2013년에 텔 아비브 한복판에서 동성애자 퍼레이드가 벌어졌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실정은 모두 현대적 의미의 이스라엘이 갖는 세속성을 방증한다 할 것이다.

유대인은 다 인종?

게다가 하마스와의 전쟁 중에 이스라엘 총리 넨탄야후가 선포했다는 다음 포고문을 들여다보면 신앙국가로서 이들의 현주소를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 있다.

이스마일 하니야와 하마스 지도자들과 작전수행자들에게

우리 이스라엘 국민들은 너희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빚을 졌다. 너희들은 우리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다. 왜냐하면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역사 속에서 유대 민족들은 지금 한 사람의 마음처럼 유례없는 연합을 이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녀들 세 명을 납치해 냉혹하게 살해했다. 이 끔찍한 진실을 알기 전에, 우리는 이들을 찾으면서 18일 동안 고통과 불안을 겪었지만 이 기간 동안 기도로, 희망으로 상호 협력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너희들은 비겁하게 너희 시민들을 방패삼고 가능한 많은 이스라엘 시민들을 다치게 하고 죽이기 위해 치명적인 미사일들을 무차별적으로 계속 쏴대고 있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우리 이스라엘이 새로 발견한 이 연합으로 강하게 묶일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있다. 무슨 논쟁을 하던지 간에, 우리 유대인들은 서로 함께 할 것이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단 한 가지 공통의 목표를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너희를 패배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24시간 안에 모든 로켓 발포를 중지해라. 분명히 모든 로켓 발포를 중지하라고 말했다.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너에게 형식적인 통보를 하겠다. 우리 탱크들은 가자 경계선에 대포와 함께 대량으로 주둔하고 있고 공군 지원력도 준비되어 있다. 우리 이스라엘 군대 진입이 임박했으며 가자 시민들은 남쪽으로 떠나야한다는 경고의 전단지를 이미 가자 지구 북쪽에 뿌려왔다. 너희가 우리 최후통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가자 지구에 들어갈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번에는 접수된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정복한 땅은 일 센치미터라도 이스라엘에게 합병될 것이며 그 곳에서는 두 번 다시 우리 시민들을 폭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희가 고상하게 항복할 수 있도록 문을 계속 열어놓을 것이다. 너희가 무장을 해제한다고 발표한 순간 우리는 진입을 멈출 것이며 그 곳에서 우리는 새 경계선을 그릴 것이다. 너희가 계속해서 우리 국민을 공격하면 우리는 남쪽으로 전진할 것이며 너희들을 쫓아내서 다시는 그런 악마적인 모습으로 그 땅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희 시민들이 노숙자가 된 것이 정말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다. 너희가 했다. 우리 국민들을 너희들의 무자비한 대량 학살의 타깃으로 용인하는 것과 너희 시민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유감이다. 너희가 우리를 싫어하는 만큼 너희 시민들을 사랑하기만 해도 이런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에게: 이스라엘은 당신들의 ‘이스라엘은 자제심을 보여야 한다’라는 끊임없는 잔소리에 지쳤습니다. 당신들이 당신들의 땅에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죽이는 목표를 세운 무자비한 적에서 계속해서 온 국민이 폭격을 당한다면 우리에게 와서 ‘자제심’이란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예의바르게 당신들의 이중 잣대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길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번에 하마스는 너무 도가 지나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할 것입니다.

하마스, 우리 국민이 이렇게 명쾌한 마음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연합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다시 말한다. 이스라엘 국민은 앞으로 장기전으로 간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암 이스라엘 하이!

분단국가로 적대국을 지척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 역시 같은 처지임을 감안할 때, 더없이 부럽기만 한 힘센 포고문이지만 하나님에 관한 표현이 사뭇 낯설다. 특히,

암 이스라엘 하이! Am Yisrael Chai!
(이스라엘은 살아있다.)

언제부터 이스라엘의 구호가 암 이스라엘 하이! 였던가?

정작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원 주인 야곱은 이렇게 외쳤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El-Elohe-Israel! (창 33: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땅값을 다 치르고서 한 말이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극단적인 유대인 연구가들 가운데는 세파라디 유대인, 즉 우리가 성서에서 만나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70년경 일어난 맛사다 항쟁 때 다 사라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맛사다 요새.

그렇다면 참 이스라엘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바울의 말이다. (롬 9장)

유대인에서 이스라엘로

바울은 일찍이 “나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한 바 있다. (롬 9:3) 요약하면 자신이 ‘끊어질지라도’ 유대인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레토릭이라기보다는 당대 실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은 이미 사실상 끊어진 이스라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전주 이씨인 나는 살면서 나 자신이 양반의 후손임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의 자손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씨 중에 양반의 후손이 아닌 사람 또한 그동안 나는 본 일이 없다. 김씨, 박씨..,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혈통에서) 붙은 것인가, 끊어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바울의 저 말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급진적인 것이다. 그에 의해 로마서 9-10장에서 언급된 유대인은 이미 해체를 당한 처지인 까닭이다. (자신이 정말 저주를 받겠다라기보다는 해체 당한 유대인을 향한 역설이었다고나 할까…) 왜? 만약 에스라와 느헤미야… 제2성전의 주역들이 다시 돌아왔다면 당시 유대인은 몇 명이나 남아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참고로 사도행전 2장, 6-7장을 참조할 만하다. 이미 이들은 인종과 제의에 있어 종파적 다양성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 간에는 분쟁이 있었는데 스데반의 죽음은 그러한 분쟁의 극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예를 들면 나는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은 아버지가 유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둘 다 유대인인가? 한 명만 유대인인가? 붙은 것인가? 끊어진 것인가? 현대 랍비들의 유권해석 역시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생김새가 영락없이 유대인이 아닌데도 이스라엘 현지에서 ‘쥬’(Jew)로 불리는 사람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그 시절에 펼친 참 이스라엘론(論)은 실로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 어린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종말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것 같다. ‘회복’이라든지 ‘백투이스라엘’이라든지 고토신학을 토대로 하는 이런 용어 또는 그 이상 자체에는 해로울 것이 없다. 다만, 일반 기독교인을 자극하는 (본토에 대한) 이와 같은 막연한 상상력과 연동 된 종말론은 정작 당대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울과 초대교회 설립자들의 애를 먹인 유대교식 특수주의를 (전혀 유대 혈통도 아닌) 조선의 후예들이 이어 받는 격이 된다는 사실이다.

누가 이스라엘인가? 라는 질문은 곧,
어디가 이스라엘인가?로 치환될 수 있음을 유념할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미국 복음을 받아들일 당시 미국 현지에 있던 유대교적 향수가(디아스포라에 의한) 고스란히 이입된 면이 크다. 그것은 ‘이스라엘’이기보다는 ‘유대인’이라는 매리트에 준거한 향수에 다름 아니다. 그 매리트란 바울이 그토록 항거했던 바, 그리스도인이면서 유대인이 되고자 하는 막연한 ‘회복’ 아니었던가. 바울은 이를 잘라버리라고 단호히 말한 바 있다(갈 5:12).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

이러한 제반 사안들을 살필 때 이스라엘, 그 실체 내지 인수는 실로 희박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참 이스라엘’이 은폐되어 있을 그곳 고토를 향해 기도해주어야 할 것임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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