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의 기독교를 속칭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사미자’(사랑의교회/미래를경영하는연구자모임)로 규정하고 국회 원내의 높은 개신교 비율과 사회 정의 간의 괴리감으로 서론을 시작한다. 이와 같은 세속적 통계를 개신교와 권력의 유착 관계로 특정하고 그 뿌리와 핵심 기반을 20세기 초 서북인들의 출신 성분과 그들의 이주 동선에서 찾아 유래로 제시한다.
그러고는 궁극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선한 목자’로 통칭되는 개신교의 교조적 핵심 인물(들)의 레이아웃을 투영해내는데, 저자 김진호가 사명감 넘치게 주도하는 이 기획 곧, 한국교회의 성배를 거꾸로 엎어 놓기 위한 이 작업을 청취하다보면 독자에게는 아마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법하다. 한국교회의 진리는 모두 허구였나?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창비와 저자 김진호는 결국 한국교회의 ‘선한목자’로 통칭되는 한경직 목사가 ‘4·3’ 뒤에 있었다― 바로 이 말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진다.
진리(眞)란 무엇인가? 선(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선한 것이란 무엇인가? 말이 나온 김에 이에 관해 좀 언급하려고 한다.
이를 테면,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하였을 때 칼로스(καλός/ 선한)는 “아름다운 목자”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선한 목자”라 번역하는 것은 ‘아름다운’ 목자는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기제의 반영일 것이다. 이 책이 진리처럼 추구하는 善(옳은 것? 바른 것?)에 관한 강박이라고나 할까.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1-13.
그렇다면 “선한 목자”라 표기할 때, 더욱 명백하게 ‘선한’을 뜻하는 어휘 아가토스(ἀγαθός)를 놔두고서 어찌하여 칼로스라 표현했을까? 이와 같은 용법에 기인하여 요한복음의 권위자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은 “나는 모범 목자다”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지만 개운치가 않다. “나는 모범 목자다!”(the model shepherd) 하면 은혜가 되겠는가?
“나는 선한 목자라”는 이 문맥을 읽을 수준을 갖춘 고대의 독자였다면 아마도 칼로카가토스(καλοκάγαθος)라는 고대의 교육 술어를 떠올렸음직하다. 칼로스와 아가토스를 합쳐서 만든(καλὸς καί ἀγαθός) 이 말은 ‘멋지고 용감한’ 또는 ‘선하고 강직함’을 지칭하는 술어로서, 순교를 마다않는 영웅이나 기사도 정신의 이 미덕을 ‘목자상’(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목자)으로 변용해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καλὸς는 ‘아름다움’(美)이라는 의미 속에서 ‘선’(善)을 뜻하고, ἀγαθός는 ‘용기/용맹’(勇)이라는 의미 속에서 ‘선’을 뜻하는 어휘이다.
이리하여 당초의 ‘선한 목자’를 ‘아름다운 목자’로 상정한다면, ‘목자’라는 의미는 ‘선함’ 그 자체를 대응하는 대응어인 셈이다.
καλὸς | ποιμὴν /아름다운 목자
καλὸς καί ἀγαθός /아름답고 선함
따라서 ‘선한 목자’의 ‘선함’은 결코, 이놈이 죽여도 응야, 저놈이 죽여도 응야, 하는 식의 그런 의미의 선함이 아니라, 분명한 기사도 정신(chivalry)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이 “나는 선한 목자다”에서의 ‘목자상’이다. 차라리 기사(knight)에 가까운 목자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이 말은 역사적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는 전승파괴적 관념에 대항한 저돌적인 캐치프레이즈였다 할 수 있다.
모든 복음서에는 나사렛 전승이 배척을 당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가령 마태복음이 이 ‘나사렛 전승’을 옹호하기 위해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어찌어찌하여 이집트를 경유해 나사렛에 최종 정착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산하기 이전에 이미 그 부부가 나사렛 출신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명령을 사연으로 추가한다.
마태와 누가의 이러한 수고에 비하면,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이 한 마디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 1:46) 라는 터부 의식을 향한 강력한 전면승부로서 초기 복음의 양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나는 선한 목자다!”(나사렛 출신이면서)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받아든 복음의 실체이자 정신이 되었다.
즉 지역적 편견의 극복이 곧 복음이었던 셈이다.
▲‘창비’에서 제공하는 「교회와 권력」 개요
그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뿌리와 성장 요인을 영원히 출세치 못할 운명적 신분인 서북인들이 미국 복음을 급속히 받아들인 인과에서 찾는 이 「권력과 교회」라는 문집의 인본적 사유는 신학이라기보다는 한마디로 쓰레기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좌절시켰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전후 1세대 서북 출신 목사 한경직을 필두로 하는 천한 신분의(홍경래 난의 후손이라고 이 책은 설명) 서북인이 개화사상과 복음을 대안으로 받아들이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으나 공산당에게 재산을 몰수당하자 대거 월남하는 바람에 남한이 급속도로 복음화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반공주의 복음, 친미주의 복음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상도인(의 복음)’, ‘전라도인(의 복음)’.., 그동안 우리의 화합을 퇴행시켜 온 지역주의를 도리어 서북인에게 뒤집어씌워 그 전승과 뿌리를 훼손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지역주의 극복의 가치를 담은 칭호 ‘나사렛’ 예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한경직을 비롯한 1~1.5세대를 효과적으로 훼손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전통성을 파괴하려는 기획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실제로 우리 대한민국, 특히 한국 개신교는 동족상잔의 비극의 중심선상에 서 있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를 어떻게 석의할 것이냐―는 문제는 그 ‘선한’ 신학의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 아름다운 것은 저열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의 생각을 선(善)으로 추구하는 정의의 사도들은 성배를 거꾸로 뒤엎는 앙갚음에 천착하기 마련이다.
진리(眞)는 선(善)한 것인가 아름다운(美) 것인가?
선한 목자는 선한 목자인가 아름다운 목자인가?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돌판을 깨뜨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직후 야웨 하나님께 올라가 영광을 보여 달라 청구하는 장면을 진지한 신학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자리에서 모세는 야웨(또는 대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피를 묻히고 산에 오른 자가 받기에는 가당치 않은 영광의 말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성배를 뒤집거나, 십자가를 거꾸로 매다는 자들이보기에는.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맡은 자들을 최종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용맹스런 목자였음에 틀림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야웨 하나님의 영광 속에 본 ‘선한 것’은 바로 토브(טוּבִי)였던 것이다. 선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바로 그것이다. 칼로스(καλός)처럼.
구약성서는 또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동족상잔의 비극 직후의 말인데,저기서 ‘말레’(מָלֵא)라는 단어를 ‘헌신’이라 번역한 것은 다소 과도한 번역으로, 그것은 자기 형제들이 잘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충만’케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어휘이다. 이것이 천지창조에서 ‘번성하라’(창 1:28)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세의 용맹으로 이스라엘의 절대다수는 길에서 사멸하지 않고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진수이다.
한경직 목사는 자기의 양들을 지켰다.
황금 송아지상인 공산/사회주의로부터.
한 가정의 역사에도 땀과 눈물과 그리고 피값으로 그 시간이 채워지듯이 한 민족의 노정도 그런 고결한 가치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말레’(מָלֵא), 곧 번영의 의미이며, 토브(טוּבִי)와 칼로스(καλός) 곧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원리인 것이다.
「권력과 교회」는 이 진리를 거꾸로 뒤집어 엎으려 하고 있다.
‘창비’ 출판사에서는 ‘권력’ 시리즈로서 「권력과 검찰」 「권력과 언론」을 이미 출간한 바 있고, 금번에 출간된 「권력과 교회」는 그 연속 출간물의 세번째로 알려져 있다. 그 시리즈 중에 「권력과 출판」 하나를 더 산입할 것을 긴급 제안 드린다. 나서는 집필자가 없다면 필자가 참여할 용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