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은 기독교 패러다임의 근간이다.
BC 15세기 이집트 천민이었던 히브리 민족의 탈출기는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원형이 되었다.
그로부터 1천여 년이 흐른 BC 586년 남 유다의 멸망 이후, 바벨론에서 무려 70년간이나 뿌리를 내린 유다 민족이 3차에 걸친 본토로의 이주를 탈출로 이해한 것은 그들이 사실상 이집트 탈출기의 편찬자인 동시에 독자였던 까닭이다.
이들이 탈출하면서 가졌던 은밀한 식탁 연회는 유월절이라는 유대교·기독교를 관통한 유서 깊은 절기가 되었으며, 탈출 직후에 직면한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은 광야 시험의 예형으로 제시 되었다.
뿐만 아니라, 탈출을 기호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홍해 도하(渡河)는 신약성서 저자들에 의해 세례라는 구속사 예전의 모형이 되기도 했다. (탈출)이전의 세상을 표지하는 이집트/바벨론은 물을 경계로, 죄 된 세속 세계로 규정된 것이다.
이와 같이 탈출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 의료, 기술 등 북한의 제도권을 지원해온 선교 정책보다 북한 탈출민을 돕고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은 언제나 본원적인 기독교 선교라 하겠다. ‘탈출’을 독려하고 후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탈북민 송환 요구에 기독교가 궐기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북민 송환을 자극하는 궐기의 대상들이 저 분단선 넘어에만 아니라, 남한 내에 버젓이 있는데도 교회, 신학교, 교단, 목회자들은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특히 평소에 (동성애자 등의) 인권 발호를 부르짖던 기독교 오피니언 리더들까지 침묵하는 일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탈출자를 탈출/탄압의 원점으로 되돌려보내려는 시도를 ‘인권’이라 규정하는 인권 변호사들의 궤변에 침묵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탈출을 감행한 이들이 겪는 외상은 정착 후에도 지속되기 마련이다. 남겨두고 온 가족, 기대와는 전혀 다른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이러한 요인들이 뒤흔드는 것은 ‘심리’이지 ‘정신’이 아니다. 설령, “우리가 이집트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하더라도 그것은 심리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심리를 돕고 치유해야 할 사회가 도리어 불안을 부추기는 거짓 인권과 언론으로 창궐해진 이때에, 진정한 인권과 진실의 보루인 기독교가 침묵한다면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거짓 인권과 심리 전술에 결코 한 생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