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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이의를 받았던 주제에 관해 연휴기간 짬을 내어 잠시 부연하고자 한다.

“사람을 낚는 어부ㅡ”라 하신 적이 없다
ㅡ 라는 주제이다.

이는 널리 일반화된 표현에 대한 꽤 자극적인 제목이었지만, 글의 논지는 ‘문자’와 ‘기호’ 간에 일어나는 해석의 문제였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문자는 변치 않지만 기호와 해석소는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진리가 변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해를 하는 해석자들의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해석의 결과이지 본래의 표현이 아니다.

문자 자체는 본래 ‘사람들의 어부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그런가 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를 교회의 무슨 세일즈맨으로 기르고 키우는 행위는 다 현대적인 의미의 변화일 것이다.

전도를 보이스 피싱(fishing)하듯 하는 시대가 도래한 탓일 것이다.

좋든 싫든 다 이해의 변화이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한글.

한글로 ‘사람을 낚는 어부’는 사실상 영어 Fisher of Men의 관용적 의미에서 옮겨온 말이다. 영어는 근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의 언어이기에 가장 널리 분포 되어 있는 성서 언어였고 우리는 그 선교에 대한 피선교국인 까닭이다.

그 다음은 영어.

Fisher of Men을 직역하면 역시 ‘사람의 어부’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도 ‘사람을 낚는 어부’이다. 영어의 전치사 다음에 오는 명사는 반드시 목적어인바, 관용적으로 그렇게 굳혀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관용적 의미는 언제 어디서 도래하였을까.

17세기 역본인 KJV 성경은 이미 Fisher of 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KJV 보다 100년 정도 이른 시기의 영어 성경인 Tyndale 성경은 Fissher of Men이라는 표기를 하고 있었다. Fissher라는 낱말은 아마도 앵글로 색슨어인 fiskari에서 비롯된 독일어 Fischer의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앞서 5세기의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 성경에서는 piscatores hominum으로 되어 있다.

hominum은 사람(homo)의 복수 속격이며 piscatores는 어부(piscator)의 대격으로서 이는 헬라어 원문 할리에이스 안트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바로 이 할리에이스 안트로폰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사람들의 어부들’(Fishers of Men)이다.

명사의 어순과 격이 다 그러하다.

그렇다면 쟁점은 이들 영어(Fisher of Men, Fissher of Men), 라틴어(piscatores hominum), 헬라어(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가 어느 지점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관용적 의미로 발화하였는지를 알아보는 일이 관건일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방법은 대개 문자에 대한 역사적인 추론, 이를테면 그 문자와 같은 표현을 지닌 동시대 문헌이 또 있는지를 살피는 정도이다. 이러한 천편일률적 방법의 분야를 성서신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수행하는 해석자에 따라 맹아적 일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철저히 문자적이고 또 문자 보전을 고수하는 태도 같지만, 사실은 문자적이지도 않으면서 지극히 자기 관념에 매몰된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참조: 성경 해석 방만해졌을 때, 축소함으로써 본질로 다가가야)

앞서 이 문제를 ‘문자’와 ‘기호’ 간에 일어나는 해석의 문제라 일러두었다.

통상 해석이라는 작용이 일어나려면 다음 세 가지 단계가 발생한다.

도상(icons), 색인(indexes) 그리고 기호(symbols).

가령 ‘사람을 낚는 어부’라 하였을 때,

도상은 ‘(고기 잡는 풍경의) 어부’ 또는 ‘물고기’일 것이다.

그리고 색인은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또는 fishers of men 즉, 문자 자체이다.

끝으로 기호는 우리 몸 속 ‘해석체’와 결합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통상적인 해석의 작용 단계에 하나를 더 덧붙여 읽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경전 해석에 다다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윤리체’라는 해석소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마치 (보이스) 피싱 같은 비윤리적 행태로 전락했을 때는 종전의 해석은 해석을 통하여 파괴됨이 마땅한 것이다.

이 주제에 적대적인 반론을 폈던 사람들은 대개 문자주의자, 다른 말로 하면 ‘색인 기술자’로 전락한 사람들이었던 기억이다.

이들은 대개 성서신학 전공자들이었을 것으로 성서신학이라는 신학의 궁극적 요체를 한낱 문헌 정보학으로 전락시키려는 경향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관용적) 표현이 KJV에서 발견 되면 그것이 증거라 말하고,

동시대 헬라어 문헌에서 발견 되면 그것이 증거라는 식이다. 일종의 색인으로서 증거를 삼는 것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에 대한 성서 언어 시대와 동급으로서 대표적인 색인은 플루타르크(Plutarch)가 집필한 ‘On Being a Busybody’라는 작품의 한 대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ἐξ ἀποδημίας προσιὼν ἠρώτησε, “μή τι καινόν,” ἐζημίωσαν αὐτόν. ὡς γὰρ οἱ μάγειροι φορὰν εὔχονται βοσκημάτων οἱ δ᾿ ἁλιεῖς ἰχθύων, οὕτως οἱ πολυπράγμονες εὔχονται φορὰν κακῶν καὶ πλῆθος πραγμάτων καὶ καινότητας καὶ μεταβολάς, ἵν᾿ ἀεί τι θηρεύειν καὶ κατακόπτειν ἔχωσιν. (Plutarch, On Being a Busybody, Moralia, 519)

번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마을 밖으로 나갔던 사람이 와서는 물었다. ‘뭔 소식 있어?’ (그러자) 그들은 그를 벌금형에 처했다. 요리사들이(μάγειροι) 풍부한 재료 공급을 위해 갓 부화한 ‘물고기의 어부들’(ἁλιεῖς ἰχθύων)로 하여금 큰 수확을 기원하는(εὔχονται) 것과 마찬가지로, 참견하기 바쁜 사람(πολυπράγμων)은 재앙에서 좋은 수확을, 고충 속에서 좋은 수고를, 그 참신함과 변화를 위해 기도한다. (저) 요리사들과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언제나 뭔가를 낚거나 도살자들을 가질 수 있다.”

이 플루타르크 본문 중에 등장하는 ἁλιεῖς ἰχθύων(물고기들의 어부들)가 바로 ‘사람들의 어부들’이 갖는 문법과 같은 색인이다.

이 색인은 두 개의 중요한 해석을 조명해준다.

첫째, 플루타르크의 할리에이스 익스튀온(ἁλιεῖς ἰχθύων)은 문자적으로 ‘물고기들의 어부’이지만 문맥상 ‘물고기를 낚는 어부’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이 색인에 ‘사람들을 낚는 어부’(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로 적용하면 들어 맞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어부들’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가?

둘째, 그렇지 않다. 이는 오히려 동시에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익스튀온(ἰχθύων)은 그냥 물고기가 아니라 갓 부화한 ‘어린 새끼 물고기들’로서 아무런 가책 없이 그들을 낚아대는 어부에 대한 기대를 지탄함이 본말이기 때문에, 이 색인은 오히려 ‘물고기를 낚는 어부’라는 자연스런 의미소를 파괴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사냥꾼’의 기호와 같은 ‘인간들의 어부’(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라는 형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어부’.

‘인간들의 어부’는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인가 무익한 존재인가.

사람을 낚는 어부

헬라어의 소유격은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 문법 요소 중의 하나이다.

영어의 경우 전치사 다음 명사는 필히 목적어로 규정하는 것에 반해 헬라어는 이중적 의미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체적 소유격과 대상적 소유격의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들의 어부’가 인간에게 많은 인간을 잡아다 바치는 유익한 존재의 뜻이라면 인간은 어부의 주체가 된다. 이를 헬라어에서는 주체적 속격이라 부른다.

반면, ‘인간들의 어부’가 많은 인간을 잡아가버리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익한 존재라는 뜻이 되면 인간은 어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헬라어에서는 대상적 속격이라 부른다.

자, ‘인간 사냥꾼’, ‘인간 백정’, ‘인간 어부’…

이 도상의 전개 속에서 우리는 현대인이 갖는 해석체가 망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잔혹한 기호의 위상을 한낱 다단계식 교회 세일즈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ㅡ”

본래 신약에 이 언명이 들어오기까지는 철저한 심판주적 언명이었던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람을 낚시질 함으로써 기독교 인구를 증식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래 이 언명은 에스겔, 하박국, 예레미야의 예언에 담긴 기호를 역설적 기호로 가져온 것인데,

에스겔의 낚시는 본래 물고기를 들판에 내던진다는 것이었으며, 하박국의 낚시는 악인이 의인들을 고기 낚듯이 낚는다는 저주였으며, 예레미야의 낚시는 낚시꾼을 포수들과 함께 풀어서 (우리를) 사냥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경고로서, 다 심판의 언명이었다.

할리에이스 안트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이라는 문자가 갖는 제1의적 도상은 바로 심판의 기호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심판주적 기호에 어떤 교회는 ‘전도왕’이라 하고는 금반지를 상품으로 건다.

인간 사냥꾼에게 상품을 하사하는 격이다.

결국

앞서 “사람을 낚는 어부ㅡ”라 하신 적이 없다는 이 주제는

‘인간들의 어부’라는 기호의 탈환을 통해 할리에이스 안트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에 담긴 종말론적 대상과 주체로서의 인간과 어부를 각인하는 조처였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요나의 물고기 기호를 해석체로 들여왔던 것은 그런 우의적이면서도 비의적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예술가들의 이러한 물고기 도상도 있다. 이것은 큰 물고기 뱃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물고기들의 사냥을 은유한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의 작품.

참고로 독일어 역본의 특기 사항을 염두에 두면 좋다.

Ich will euch zu Menschenfischern machen

‘사람들을 낚는 어부’를 멘첸피서(Menschenfischern)라 쓰고 있다. 인간을 뜻하는 멘첸(Menschen)과 물고기를 뜻하는 피셔(Fischer)를 합하여 여격으로 만든 말이다.

독일어는 여러 개의 단어를 붙여서 한 개의 단어로 합성해 만드는 데 제약이 없는 문법 특성을 감안할 때(60철자가 넘는 단어도 있다), 이 술어를 단순화시키는 데 용이하였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인간어부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미상으로는 영어의 ‘사람을 낚는 어부’(Fishers of Men)라는 순화된 관용적 표현의 기원이 되었지만, 기호로서는 단연 종말론적 ‘인간어부’(사람 사냥꾼)라는 기의에 기반을 둔다 할 수 있다.

Menschenfischern을 처음 쓴 사람은 마틴 루터이며, 그 이전 고어체 독일어 역본인 멘텔린(Johann Mentelin) 성서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다. 영어식 관용어의 시작은 마틴 루터였을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대목이다.

그 과정을 거쳐서 아예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라고 쓰는 역본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NRSV).

해석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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