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 ‘분간’이라는 말은 관찰하고 깨닫는다는 뜻이 있지만(도키마조)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해석능력>을 가졌는가?
(1)
가령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 1:1)라는 말이 “폴루메로스 카이 폴루트로포스 팔라이 호 테오스…토이스 파트라신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라는 희랍어로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도저히 주님의 말씀을 접근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언어에서 다른 한 언어로 옮겨지는 것도 해석이다.
(2)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의 666(계 13:18)과 같이 숫자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해석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은 이 666이 뜻하는 바가 상품의 바코드와 일치한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곧 일어난다고 선포하였다. 벌써 25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상품의 바코드는 666이 아닌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3)
그렇다면 아래 본문의 경우(앞의 것이 계시록과 같은 상징의 형식이었다면 이것은 시편과 같은 예로 엔크립의 강도가 전자보다 더 센 것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라고 했을 때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주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지 아니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뭔가 무미건조한 해석이라고 여겨지는가?
① 과거 요셉 시대의 회고다.
②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의미하는 교훈이다.
③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계시이다.
♧
문자든 그림이든 그 무미건조함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해석행위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은폐된 것을 찾아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 (1)항의 해석은 문자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문자를 모르면 백만 천사를 대동하고 살아도 해석할 수 없다. 사전이 없으면 백만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이치이다. (2)항의 해석은 그림에 해당하는 해석이다. (숫자를 계산한 것같지만 그것은 그림에 해당한다) 유사한 형식, 반대의 형식을 지각하고 분변하는 감각을 이용해서 해석하는 능력이다. (게슈탈트라고 했던가?) 따라서 감각이 무디면 해석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3)항의 해석은 앞의 두 가지 해석 능력에다가 한 가지가 더 요구되는 해석인데 그것은 <이해>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자신을 이해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는가?
에필로그 |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그 본문의 진정한 해석의 키는 이름의 배열에 숨어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본문의 해석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 배열 코드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째서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라고 하거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라고 하거나,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이라고 하지 않고 유독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오로지 요셉의 베냐민에 관한 애틋한 정서를 반영한다. 어린 베냐민을 살기 등등한 형들 밑에 두고 타향살이 해야 했던 요셉의 연민, 총리가 되어 형들을 대면했을 때 베냐민의 안위 먼저 물었던 베냐민에 대한 그의 연민, 그것은 어머니가 베냐민을 낳자마자 죽었을 때 어린 요셉에게 배태된 끝없는 안쓰러움이었으며 또 그것은 후일 요셉 일가의 호위 속에서 자라나 첫 번째 왕(사울)을 배출할 정도의 유서 깊은 부족으로 생존해 남은 결실로 꽃을 핀다.
이것이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라는 순서쌍에 대한 분간 즉, 해석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해석에 다다를 수 있은가?
문자해석? 숫자해석? 그림해석? 그것은 앞서 주님이 가라사대,“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책망을 상기하는 바, <시대> 즉, 요셉과 베냐민과의 그 애틋한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기록된 <시대>라는 낱말이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카이로스 곧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수많은 시간 가운데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 바로 그것인 셈이다.
이것이 가장 우월한 궁극적 이해로서 해석 형식, 곧 시간을 타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 2013.8.18일자 | 시 80:1-2, 8-19; 눅 12:49-56. (c.f. 사 5:1-7; 히 11:29-12:2, 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