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은 개봉 당시 ‘좀비’라는 가상의 존재를 심층적으로 다룬 첫 국산 블록 버스터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전염병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서 야기되는 사회 문제를 꽤 의미 있게 다룬 영화였다.

이 글은 서구에서 전래해 들어와 우리에게도 일반화 된 용어, ‘좀비’의 역사적 기원에 관해 소개한 글이지만, 지금 이 시각 현재 우한 폐렴이라는 전염병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태 속에서 영화 속 내용 전개를 통해 검토할 사안이 있어 소개한다.

당시 영화를 관람하고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Daum)이 이 영화의 광고주인지, 아니면 투자자인지 자료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생한 좀비들의 살육 장면을 반(反)정부 폭력 소요 사태로 둔갑시켜 방송하는 TV뉴스 방송사 이름은 가명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댓글 검색하는 장면에서는 ‘Daum’이라는 포털 실명이 선명하게 클로즈업되는 바람에 마치 포털 ‘Daum’이 무슨 진실에 종사하는 매체인양 편집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클리셰는 관객으로 하여금 (전염병에 감염된) 좀비들이 정부의 희생자라는 인상을 강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스토리텔러는 2016년 당시의 국민을, 당시의 정부로부터 좀비화 된 희생자라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좀비’란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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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부산행. 1100만 관객. 제작비 115억
  1. 좀비란 무엇인가

좀비(zombie)는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가 브라질 역사를 다루면서 처음 언급했던 ‘zombi’라는 말에서 영미권 어휘로 들어온 말이다. 이 어휘적 유래에 유념하는 것이 좋다. 지리적 유래보다 더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의 전래도 지리적이라기보다는 언어 전래에 속한다. 이 문제는 마지막에 다시 다룰 것이다.

좀비가 서구적인 의미에서 미국화 된 시기는 20세기 초로 알려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 외에도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같은 완성도 높은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1932). 프랑켄쉬타인도 일종의 좀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메리 셸리 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1823년

프랑켄슈타인으로 미루어 볼 때 좀비의 문화적 컨셉은 산업화·기계화에 따른 회의적 인간성을 향해 경종을 알리는 코드겠지만,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진입한 후에도 좀비는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컨텐츠로, 특히 미국발 좀비 영화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최근 브레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월드워Z>도 그 중에 하나다.

익히 알려진 대로 좀비는 부두교와 관련 있다. 부두교는 본래가 샤머니즘 성향의 종교로서 그 시원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부두교는 아이티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아이티의 원주민은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1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아이티를 점령한 스페인에 의해 노예화되면서 원주민이 10여년 만에 6만명 미만으로 감소, 아이티 원주민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스페인의 판단에 따라 16세기 초 아프리카 노예들로 대체되고 아이티 본 원주민들은 멸종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이 대체 노예들이 1629년 경 아이티로 밀고 들어온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의 부두교는 카톨릭과 융합되기에 이른다. 이때 부두교가 가톨릭과 잘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톨릭의 성물 숭배 덕택이다. 여러 정령을 숭배하는 부두교와 여러 성인의 성물을 기리는 가톨릭이 이들 대체 노예였던 흑인들의 부두교와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들의 부두교가 난민과 함께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 전역에 퍼졌지만 토속적으로 흑인 인구가 많은 미국 뉴올리언즈의 부두교는 가톨릭과 결합된 이들의 부두교와는 다른 색채를 보이기도 한다.

부두교의 제단

좀비의 특성은 콘텐츠마다 다르게 표현되지만, 대개 포악한 기질로 변한 불사(죽지 않는)의 움직이는 시체로 어둠 속에서는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부두교에서 좀비는 사제에 의해 영혼이 뽑혀나간 존재를 일컬었다. 사제에게 영혼이 뽑힌 좀비는 모든 의식 체계를 잃고 명령에만 복종해야 했다. 부두교 자체가 활홀경에 빠지기 위해 더러 마약 같은 약물까지 이용하는 샤머니즘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영혼을 뽑아낼 때 약물을 먹이고 두들겨 패서 좀비화 시킨다는 사례 보고도 있다.

그래서 부두교 신자는 좀비 자체보다는 좀비가 될까봐 두려워한다고 한다. 좀비가 되는 것은 이 종교에선 일종의 형(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좀비화 된 자들은 노예로 부리거나 아예 팔기도 했다는데, 중앙아메리카에는 실제 노예 농장이 있었고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 주변에는 최근까지 성행하였다고 한다. 성노예를 포함한다.

부두교 우상들

2. 현대적 좀비

그러나 영화 <부산행>과 같이 이제 한국형 좀비까지 등장하기에 이른 21세기에는 좀비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같다. 물리력에 의해 노예를 만드는 것이 강력하게 금지된 불법인 이상, 영화에서 바이러스로 은유된 그것은 모종의 다른 의미의 감염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이 감염 행태를 세 가지로 정리하겠다.

생태 환경적 좀비: 영화 <월드워Z>는 설득력 있게 인류 전반에 걸쳐 감염된 포악과 광포를 설명한 바 있다. 핵폐기물 내지 원전 사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기오염, 수질오염, 그에 따른 조류, 가축에게 발생하는 잦은 전염병…등 환경 문제도 그렇지만 그 사태에 직면하는 우리 인간의 자세 문제이다. 단지 두려움 속에서 ‘숨만 쉬는’ 존재일 뿐, 생태계 최상위 개체로서 네페쉬가 갖는 의무와 책임(네페쉬도 숨쉰다는 뜻이지만 참되게 숨쉬는 것을 말한다)은 상실한채 한갓 좀비의 형상으로 전락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본래 신의 형상이라면서.

브레드 피트 주연의 월드워Z

대표적인 예가 2011년 초 구제역 사태를 들 수 있다. 무려 200만 마리라는 엄청난 규모의 살아 있는 돼지를 묻어버린 일이다. 염소와 사슴 수천 마리까지 포함된 이 대량 학살은 산채로 땅에 묻어버리는 형식으로 자행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병은 ‘동물의 병’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경제 병’이었다. 영화 <부산행>의 시작은 구제역 당시 가축을 잃은 한 축산 농부의 의심과  분노를 담고 있다.

사회적 좀비: 정치·경제를 포함한 오늘날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난맥상은 모든 체제 자체의 붕괴에 있다. 그것은 개별 국가나 어느 한쪽 체제에 국한된 붕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적인 종말 현상이다. 그런데 그 체제는 어떤 식으로 붕괴하나.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특히 베를린 장벽)를 보며 공산주의의 몰락이라 박수들을 쳤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의 종식이었다. 유럽의 레바논화는 냉전 시대의 평화로운 유럽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으며 그 레바논화를 주도한 탈 민주주의 잔영은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와 영향이 미치고 있다.

희한한 것은 그 탈-민주주의 잔영이 우리나라에 착상될 때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썼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를 탐욕스런 대척점으로 상정해왔지만 근래에는 자칭 민주 투사들이야말로 그 어떤 자본주의 세력보다 자본주의를 탐닉한 악성 자본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소위 작전까지 편 것으로 보도 된 바 있다. 탐욕으로 거듭난 이들 거짓 민주 투사들의 작전에 가산과 정신을 몽땅 잃으면서도 정치적 무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이들이란, 그 무형의 바이러스 마신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ㅡ

영화 <부산행>에서의 재앙은 부당한 자본을 작전으로 살려낸 펀드 매니저를 그 원인균으로 지목한다. 펀드 매니저가 약물을 쓴 적은 없지만, 펀드 매니저에게 자본을 빼앗긴 개미들은 좀비로 투영되고, 펀드 매니저 자신은 개미핥기라는 오명을 입는다.

존재감 없던 김의성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영화 부산행.

종교적 좀비: 끝으로 종교적인 좀비화이다. 여기서는 어떤 특정종교를 예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유래에서 살폈듯 ‘좀비(화)’ 자체가 종교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좀비’ 자체가 영(혼)이라는 뜻이므로 사제에게 영혼을 강탈 당한 모든 신자는 이미 좀비에 다름 아닐 것인데, 그와 같은 이단들이 성행하고 또 회중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이유는 이 같은 좀비 콘텐츠가 성행한 이유와 맥을 같이 한다. 종교적 용어로 이런 상황을 ‘묵시적 상황’이라 부른다.

묵시 상황(ἀποκάλυψις)이란 한마디로 악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 시대를 이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 것만 같은(왜, 심판이 임하지 않으므로) 시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 좀비 취급을 받거나 혹은 좀비들이 판을 치는 시대의 연속처럼 묘사된 것이다. 그 책의 제목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묵시)인 이유이기도 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오바마 정권 당시의 IS는 실제 ‘종교 좀비’의 총화를 보여주었다.

3. 한국식 좀비

좀비를 소재로 삼은 대부분의 이야기 플롯이 그렇겠지만, <부산행>에서의 좀비 역시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제거해야 마땅한 대상이다. 슬퍼하면서 때려야 하는 구타의 대상이기도 하다. 좀비는 선량한 희생자인가 강력하게 제거해야 할 대상인가? 이런 양가적 상황은 경제·문화가 온통 정치 이념에 매몰된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화되고 있는 상황의 투영일 것이다.

열차 안에서 사람이 갈린다. 친구도. 가족도.

가령 하루종일 TV만 켜 놓고 보면서 정보를 취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기사 댓글만 보고서 정보 취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식으로 취득하고 수용한 자기 정보에 준거한 판단을 신봉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를 잠식해들어오고 있다. 저마다 자기 이해와 다른 이해를 좀비로 간주하는 좀비들이 창궐하게 된 작금의 현상이 바로 한국식 묵시(혼돈)의 상황인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에 담긴 의도 자체도 그런 현상에 부채질하는 듯 보인다. 개봉 당시의 정부를 병원균을 이용한 사회 통제자로 간주한 전개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대규모 폭력사태가 이어지고 있으나 군대병력을 충원하여 국민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는 발표를 하는 영화 속 ‘안행부(안전행정부)’가 대체 어떤 정부의 안행부인지 (앞서 포털 Daum 로고를 노출한 것과는 달리) 실명을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배경에 이런 글귀를 넣고 있을 뿐이다.

‘희망의 새 시대’.

아마도 이런 표기를 국정 표어로 쓴 당시의 정부를 지목하는 듯하다.

4. 역사적 좀비

이제 최종적으로, 역사적 실존으로서 한 좀비(Zombie)에 대한 소개다. 이상 열거한 지리적 유래나(아이티 따위의) 의미화된 기호보다 더 역사적이라고 한 것은, 이 좀비가 앞서 로버트 사우니의 글에 나오는 인물로서 ‘zombi’라는 말로 가장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언어적이기 때문이다(히브리어와 희랍어 원전이 존재함에도 영어 성경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좀비라는 단어의 유래를 찾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자료에 나오는 이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에 (좀비라는 말이) 처음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을 옮겨갔지, 그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그 말을 썼는지는 거의 접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어쩌면 그  (백과)사전류들 역시 내용은 간과한 상태에서 기록 사실만 기재해갔을 수 있다. 인용의 인용만을 거듭해온 셈이다. 그 바람에 이 ‘좀비’에 얽힌 쟁점은 묻히고 말았다. 단지 흉측한 시체로.

다음 인용 단락은 그가 History of Brazil이라는 세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역사서를 남기면서 제3권에서 최초로 좀비를 기록했던 바로 그 대목이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전염병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킨다

“… 그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여 자유를 찾는 노예들 그리고 정의로부터 도망친 유색인 남성들로 채워져 나갔다. 그렇게 리크루팅 된 그 집단은 여성과의 성 비율이 문제였다. 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첫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들 흑인들은 강제로 취하는 것 외에는 여성을 가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침투로를 파고 들어와 흑인 여성들과 혼혈 여성들을 강탈해갔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인은 자신들의 아내들과 품속에 있던 딸들을 위해 그 원수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몸값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그들의 짧지만 잊히지 않는 역사의 이 실제적이면서도 유일한 기록은 정작 그들을 소멸시킨 장본인들로부터 기록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로 묘사됐고 그들의 운명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인격을 위해, 존경심 없이는 읽히는 법이 없다.”

[Robert Southey, History of Brazil vol 3. (1819), 23]

이 문맥의 배경은 브라질 식민지화 과정에서 포르투갈이 쇠락한 틈에 자기들의 자치정부를 세워가는 흑인들을 향해 묘사한 말이다. 시인 사우지는 계속해서 그들의 우두머리를 소개한다.

“그들(약탈자들)은 한 선출직 우두머리 아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용기 만큼이나 정의롭고 그런 그의 정의를 위해, 그리고 한편으론 자기 일생의 정권을 거머쥐려고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의 선한 평판을 체험한 모든 사람은 그를 카운셀러로 대했다. 사람들은 완벽한 충성심으로 그에게 복종했다. … 아마 이러한 종교적 기운은 그 복종에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그) ‘좀비’를 위해서 말이다. 이 단어는 신성에 붙이는 이름으로서, 앙골라인의 방언이다.
그들은 기도를 흉내내고 십자가를 사용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아프리카 우상·미신을 섞어낸 몇몇 의식을… 고안해냈고, 아울러 그들의 자유에 따른 국가를 세웠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의 치안을 세워, 도둑, 강간, 살인 같은 범죄들에 징계까지 하였다.”

[History of Brazil vol 3. (1819), 23]

영국 시인으로서 문학적 필치를 가미해 담아낸 이 역사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zombi란, 다름 아닌 이 글에서 소개한 그 익명의 ‘선출직 우두머리’인 것이다. 납치와 강간을 일삼던 범죄자 집단이면서 나름 법까지 세워나가더라며 시인을 개탄시킨 이 zombi는 도대체 누굴까?

실존 인물. 좀비

시인다운 완곡한 필치에 의해 zombi로 규정되고 있는 그는, 바로 17세기 말 브라질에서 유색인종을 규합해 (유색인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추앙 받는 실존 인물, 줌비 두스 팔마레스(Zumbi Dos Palmares)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Zumbi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흔히 통용되고 있는 Zombie란 앞서 저 부두교의 사체 처리 된 좀비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인물, 바로 Zumbi였던 것이다.

언어의 경로는 이상과 같이 지리적 경로보다 더욱 명확한 절대 경로로서 기원을 표지하기 마련이다.

가령 <부산행>이 개봉된 지 4년 정도가 흐른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법으로 법을 세운 사회’인가? 아니면 ‘불법으로 법을 세운 사회’인가? 언제나 초법적인 전제 속에서 권력 스스로 이르기를 법으로 세운 사회가 아니라 무슨 혁명으로 세운 사회라 공공연히 자랑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좀비의 역사와 기원이 단지 어떤 흑인·유색인종만이 좀비라는 식으로 석의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Zombie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은 1차 기표임에 틀림 없지만, 로버트 사우지의 언어에 담긴 그 기의는 좀비가 역사적 유색인종만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법’을 세우려는 모든 개인과 집단의 영(사상)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우리는 환경의 위험 문제 즉, 위험천만하기만 한 원전이 우리 사회를 좀비화시킨 게 아니라 도리어 환경보호 곧 탈 원전이라는 기이한 방식이 우리 사회를 좀비화시키고 있음을 또렷이 목격한다. 그리고 전염병을 통해서도…

이 영화가 개봉되기 1년 전의 전염병 즉 ‘메르스 사태’는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되었다. 지금 이 시각 현재는 더욱 강력한 세균전이 시작된 상태다. 당시의 정부가 사회를 좀비화시키고 있다며 성명을 내건 당시 세력들은 지금 권력을 잡아 입장이 바뀌었는데도 지금 그 어떤 역대 권력보다도 사회를 좀비화의 구렁텅이로 매몰시키는 듯하여 우려스럽기만 하다.

전염병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전염병을 통한 ‘사회 통제’라는 사실을 다들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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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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