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상기와 같은 그룹에서 가입 요청이 들어 왔다. ‘부목사는 노동자인가, 사역자인가?’라는 부제를 볼 때 이 그룹의 주동자들은 부목사가 노동자라는 것인지, 사역자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게시물에는 분명 “노동 운동을 전개합니다”라고 썼으니 부목사를 노동자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이와 똑같은 스팸을 페이지 가입 요청으로 또 보내와서 아무래도 이에 대한 답변을 해야할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언젠가 부교역자로 사역하는 후배 목회자가 고충을 전해왔다. 담임 목회자가 자기 텃밭 일을 자꾸 시킨다는 호소였다. 그래서 이런 충고를 해준 기억이 난다.
“보좌직은 공사(公私)에 구분 없이 충심으로 보좌함이 마땅하다. 어려워도 충심으로 보좌해드려라.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담임 목회자가 너를 단지 노동자로 여기거든 명확하게 컴플레인을 해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조용히 그곳을 떠나라.”
사회의 성원으로 일하는 누구에게나 부당한 처우의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원은 노동의 강도와 그에 대한 대가 그리고 자기 능력의 질을 고려해 감내한다. 그럼에도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공과 사의 혼동에서 발생하는 경우이다. 이것이 과연 사(社)적인 일인지, 사(私)적인 일인지 혼동이 깃드는 것이다.
교회로 적용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지(公), 담임 목사 개인의 일인지(私) 혼란이 야기되는 상황이다. 담임 목사는 모든 게 하나님 일이라고 하지만 지시를 받는 교역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덕과 소양이 덜 된 담임 목회자가 허다한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그 경계와 기준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텃밭에서 감자를 캐 공동체의 찬거리로 나눈다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 일이 맞다. 그럼에도 부교역자는 내가 감자 캐러 왔나? 설교하고 애들 가르치러 왔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공동체의 식사 찬거리는 누가 수확하나? 수확할 사람이 없으니 담임 목회자 당신만 감자를 캐고 부교역자인 나는 담임자 당신 대신 설교를 하면 될 일이다.
맞나?
이 ‘부당한’ 처우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일’ 대신 ‘노동’이라는 이름을 탑재하고, ‘성령’이라는 추동력 대신 ‘인권’이라는 명칭으로 갈아치우고 그 권익을 발권하려는 모양새들이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진정코 당신들의 정의가 정당하다면 부디 부당한 착취는 근절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음 예시를 유념할 일이다.
그 ‘권익’에는 텃밭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만 있는 게 아닐 수 있다. 어떤 부목사의 경우 자신의 ‘설교권’을 주장하는 경우를 본 적 있다. 심한 경우는 부목사가 자신의 극히 ‘사(私)적인’ 신학 입장을 유포하는 행위를 여기 권익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를 테면 부목사에게 새벽 기도 설교를 시켜놨더니 ‘박근혜’ ‘문재인’ 타령을 한다든지, 유독 ‘부자 놈들 타도하라’를 강조한다든지, 그래서 교인들이 은혜는 커녕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면(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거 들으려고 새벽에 나왔나?’) 이는 누구 책임일까.
더 심각한 사례도 있다. 설교에 대한 기본 소양 문제를 넘어 이를 테면 ‘사도신경’이 신학적으로 신성하네 부정하네… 이 복잡한 내용을 부교역자가 자기 설교로 과시해놓고는 이런 행태에 대한 지도 받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구 책임일까.
당연히 담임 목회자의 책임이다. 모든 것은 담임 목회자 책임이다. 담임 목회자가 그 부목사를 기용했을 테니 담임 목회자 책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 목회자는 부목사의 설교를 지도할 수 있는 것이며, 부목사는 언제나 담임 목회자의 책임 아래 놓이게 되는 이치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 ‘권위’ 행위를 ‘권익’으로 뒤집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부류들이 모여 공조를 이루려는 것이 지금의 실태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자 타도하라’고 설교한다든지 ‘사도신경 이슈’ 같은 주제를 머리에 담고 있을 정도의 부목사라면 이와 같은 ‘권위’ 행위의 질서를 모르지 않을 것으로,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지도(또는 치리) 받았다’는 그 사실에 대한 앙갚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권익’의 실체는 ‘텃밭 노동’이나 ‘착취’가 아니라, 사실은 구겨진 자존심이요 앙갚음인 셈이다. 이 앙갚음이 노조라는 리바이어던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시도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덕 없는 담임 목회자들이 자중함으로 저런 괴생명체들이 잦아들으면 좋으련만, 시기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낮은 시점으로 진입 중이라면 당사자들은 다음을 명심해두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부목사들의 노조(노동조합)화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혐오하신다. 왜냐.
이런 예시를 해 안 됐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단으로 엄격히 분류되는 제 7일안식일예수재림교(안식교)에서 여성 선지자로 모시는 여성이 있다. 엘렌 지 화이트(Ellen G. White)라는 여자이다. 이 여성은 실제로 많은 이단적 사상을 유포했으나 유일하게 단 하나, 단 한 가지의 유용한 징조는 내다본 일이 있다.
그녀는 ‘노조’를 말세에 환란을 몰고 올 사탄의 매개물로 보았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삶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우리 사회의 노조가 열악한 텃밭 노동 현장이 아닌, 정작 텃밭 노동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화려한 현장에서 극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역설은 이 징조를 잘 반영한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삶은 어려움에 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목사 노동조합은 필경 ‘텃밭의 착취’로부터 시작할 것같다. 그렇게 시작한 다음 부목사 시절에 과시하다 좌절된 허황된 설교를 합법적으로 유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으로 마무리할 것이다.
이것이 ‘조합’의 원리이며, 이것이 교회에 적용될 때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막 13:14; 마 24:15; cf. 단 9:29; 11:31; 12:1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를 조합이 차지하거나, 또는 교회의 머리로 하여금 머리 숙여 경배하기를 원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